“선생의 책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유신시대 금서 ‘전환시대의 논리’ 스테디셀러로 퍼져나가
“글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 추구에서 시작되고 그친다”
“나는 그 책을 밤새워 읽었고, 그 후에도 읽고 또 읽었다. 그 책을 먼저 발견한 동료가 내게 권했던 것처럼 나 역시 만나는 동료·후배들마다 그 책을 권했다. 그러나 그 책은 우리가 지닌 상식에 어떤 것을 보태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네 머릿 속에 들어 있는 상식을 버려라. 네가 진실로 믿고 있는 많은 것들은 허위의식, 그러한 미신들을 네 머릿속에 주입한 이 우상들의 세계의 본질을 꿰뚫는 새로운 눈으로써 이 세계를 다시 바라보라.’ …그래서 진실을 안 데 대한 최초의 반응은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일 수밖에 없었다.”(김세균 서울대 교수)
‘그 책’을 읽고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고, 같은 대학 조희연 교수는 “이미 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냉전적 의식 및 사고의 깊은 중독 상태에서 벗어나는 지적 해방의 단비를 맛보았다”고 했다.
1974년에 창작과비평사가 펴낸 리영희의 평론집 <전환시대의 논리- 아시아·중국·한국>. 리영희라는 새로운 민주주의 전사, 우상 파괴자의 등장을 알린 그의 첫 단행본은 1970년대 유신 전체주의 억압체제하에서 “‘전논’이라는 은어로 불리면서 학생과 노동자들 사이에 ‘해일과 같은’ 폭발력으로 퍼졌다.”(김삼웅 <리영희 평전>) 금서가 된 이 스테디셀러는 이처럼 권력의 감시망을 뚫고 떠돌고 회자되면서 20세기 말 한국사회 격동을 예비했다. 87년체제와 민주정부 탄생이 상징하는 한국 민주화와 변혁운동의 이론적·실천적 주역들 다수가 그 세례를 받았다. 그런 점에서 리영희는 분명히 ‘의식화의 원흉’이요 ‘주범’이었다. 베트남전에 개입하기 위한 미국의 ‘통킹만 사건’ 조작 사실을 폭로한 대니얼 엘스버그와 그 사실을 보도한 <뉴욕타임스>의 보도태도를 부각시키고, 냉전의식에 사로잡혀 미국사회를 분열과 해체상태로 몰아가던 반공주의세력을 비판하면서 권력의 언로차단과 비밀주의, 자유 억압이 결국 비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논한 그 책 제1장은 이후 평생 변하지 않은 우상파괴자 리영희의 존재방식에 대한 예시였다. 코페르니쿠스처럼 ‘가설’임을 전제로, 6개의 장으로 구성된 그 책은 중국에 대한 접근을 축으로 한 이른바 ‘닉슨 독트린’에 따른 연쇄반응인 주한미군 감축, 그 자리를 대신할 일본의 군사적 재무장, 그것이 야기할 한반도 정세의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담고 있으며, 아무것도 모른 채 조건반사의 토끼처럼 권력과 외세의 조종에 놀아나던 한국인들에게 토끼장에서 벗어나라고 절규한다. 그가 전한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으며, 그것은 결연하고 처연했던 그 뒤 한국사회의 변혁을 예고했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는 유명한 선언적 머리말이 실린 <우상과 이성>(1977년, 한길사)은 <전환시대의 논리> 출간 이후의 세상변화까지 담은 그 책의 ‘속편’적 성격을 지니면서 그 책과 더불어 리영희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광복 32주년의 반성과 중국이란 나라, 베트남전 총평가, 냉전과 독일통일문제 등을 담아 시야는 더욱 넓어졌다. 이 책 두달 전에 <8억인과의 대화>(창작과비평사)가 나왔다. 1974년에 한양대가 설립한 ‘중국문제연구소’를 맡은 리영희의 중국연구 성과를 담은 <8억인과의 대화>는 해외 중국 전문가들 저술의 편역이었음에도 출간 약 2달만인 그해 11월1일 중장정보부가 판매금지 조처를 내렸다. 그 책이 판금당한 바로 그날 <우상과 이성>이 출간됐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고 있던 그 상황에서 당국은 그 이념적 배후로 리영희를 지목했고 <전환시대의 논리>와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은 그를 반공법으로 옭아넣는 구실이 됐다. “1977년 11월23일 아침 7시, 나는 집에서 세 사람의 낯선 손님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다짜고짜로 서재로 올라가 수백 권의 책을 훑어 꾸린 다음 ‘잠깐 조사할 일이 있으니 함께 가자’고 했다.” 그가 끌려간 곳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이었고 1980년 초에야 그는 광주교도소에서 출감했다.
<80년대의 국제정세와 한반도>(1984년, 동광), <분단을 넘어서>(1984년, 한길사), <역설의 변증- 통일과 전후세대와 나>(1987년, 두레)는 이스라엘-아랍 등 제3세계로 그의 시선을 더욱 넓히는 한편, 문화적 접근단계를 넘어 군사협력체제로 나아가던 한-일 보수정권 유착관계의 진화와 이를 뒤에서 조종한 미국의 세계정책 구상 분석을 중심으로 핵문제와 통일 문제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킨 그의 ‘80년대’ 저작들이다. 이들 80년대 저작 중에서 특별한 책 하나가 그의 탄생부터 5·16쿠데타 직후 그의 30대까지의 삶을 뒤돌아본 <역정>(1988년, 창비)이다.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하게 녹아 있는 이 책의 내용은 이후 말년까지 그가 여러 글과 책에서 회고하고 재인용한 그의 삶의 형적들의 원형을 이룬다. 고향에 대한 애틋한 기억들, 가난했던 서울 유학시절, 문사기질의 그가 경성공립학교 전기과와 국립해양대 항해과에 들어가게 된 삶의 궤적과 백범 김구를 연모하며 4·19혁명에 뛰어들었던 얘기, 미군 통역장교 등으로 복무한 7년간의 군대생활, 그때 목도한 군과 국가의 부패와 부도덕이 그의 인생지침을 돌려놓게 되는 과정, 언론사 입문 과정 등이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장교 시절 군인들이 불쏘시개로 삼던 신흥사 목판경전들을 구한 얘기, 술 마신 기분에 호기를 부렸다가 도리어 준엄한 꾸중을 듣고 무릎꿇고 사죄해야 했던 어느 진주 기생의 기개와 인간적 무게를 보며 깨친 생각 등 흥미로운 대목들이 많다.
<自由人, 자유인>(1990년, 범우사),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1994년, 두레), <스핑크스의 코>(1998년, 까치), <반세기의 신화- 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1999년, 삼인) 등 그의 ‘90년대 저작’들에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급속히 진행된 현실사회주의체제 붕괴를 지켜봐야 했던 리영희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고뇌가 깊게 배어 있다. 하지만 그의 1970년대적 시선과 문제의식은 일관되게 유지되며 종교·문화·언론·통일문제를 아우르는 그의 사유는 더욱 깊고 풍성해진다. 1996년 지중해 일대를 여행한 뒤 쓴 <스핑크스의 코>는 지식·문화·종교·예술·정서 등 모든 면에서 오로지 자기 것만을 내세우며 약자에게 이를 강요한 지배적 문명, 그 폭력숭배와 잔인성, 반지성, 반문화, 몽매와 독단이 이집트 스핑크스의 코를 무참하게 뭉개버린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를 처참하게 망가진 얼굴의 한국사회와 대비시킨다.
2005년에 문학평론가 임헌영 교수와 대담형식으로 엮은 회고록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은 리영희의 삶과 사상의 종합편이다. 리영희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역할을 맡은 임 교수의 주도면밀한 진행에 따라 리영희의 삶과 기억들은 깔끔하게 정리되고 풍부하게 종합된다. 원숙과 깊이, 그리고 삶에 대한 달관의 경지까지 느낄 수 있는 <대화>는 <전환시대의 논리>의 문제의식이 세상과의 사투를 벌이며 마침내 당도한 변증법적 종합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은 ‘자유’와 ‘책임’이었다.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이런 신조로서의 삶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듯이 바로 그것이 형벌이었다. 이성이나 지성은커녕 상식조차 범죄로 규정됐던 대한민국에서랴.”
2006년에 한길사가 기존 저서에 담지 못한 글들을 모은 새 책 <21세기 아침의 사색>을 포함한 총 12권의 ‘리영희 저작집’을 냈는데, <8억인과의 대화>, <중국백서>(1982년, 전예원)는 번역·편역·주해서라는 이유로, <인간만사 새옹지마>(1991, 범우사)와 <동굴속의 독백>(1999년, 나남) 등은 기존 저서들에 담긴 내용들과의 중복이나 재수록을 이유로 제외했다.
-한겨레 신문-
사르트르와 리영희
때로 글처럼 무력한 것이 없다. 그것은 추위, 배고픔, 전쟁의 고통에 있는 단 한 사람도 구제하지 못한다. 삶은 늘 지금 당장의 문제다. <구토>, <말>을 쓴 장 폴 사르트르는 1964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그해 <르몽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구토>는 아무런 힘도 없다”고 고백했다. 몇달 뒤 그는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됐으나 이 상마저 거부했다. 그에게 글은 ‘세상을 향한 적극적인 말 걸기’여야 했다. “작가의 기능은 아무도 이 세계를 모를 수 없게 만들고, 아무도 이 세계에 대해서 ‘나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데 있다.”(<문학이란 무엇인가>, 1947년) 그의 ‘앙가주망’(참여)은 그렇게 지식인의 긴장, 양심과 저항을 물었다. 사르트르는 나치의 지배를 받던 시절이 가장 자유로웠다고 말했다.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매일 정면으로 모욕을 당할 때 난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었다.” 옴짝달싹 못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몸짓 하나하나는 앙가주망의 무게를 지녀야 했고, 그것이 바로 자유라고 했다.
리영희 교수는 “사람은 저항함으로써만 자신을 확정해나간다”는 사르트르의 생각을 받았다. “그럴수록 악덕한 제도, 정치, 사상에 굴종하지 않는다는 저항적 인간을 목표로 해야겠지. 시시한 물건 따위에 만족하지 말고 스스로의 사상과 행동을 결정하는 주인이 되는 거야.”
(<리영희 프리즘>, 2010년) 홍세화는 그 책 서문에서 “(그는) 우리가 왜 이 시대를 ‘편안하게 죽어가는’ 대신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지 이유를 캐묻고 있다”고 썼다.
레지 드브레는 지식인이 멸종할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의 척박한 운명을 예고했지만 위로가 되지 않는다. ‘주인’ 없이 부유하는 글들은 오늘도 온통 ‘전쟁과 포격’이다. 큰 스승을 보내는 하루, 그 공백이 크다.
-함석진 한겨레 기자-
자유인 리영희
부음을 듣고 내내 마음이 울적하다. 육친도 아니고, 특별한 사적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럴까. 장일순, 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지만, 그때에 비해서도 상실감이 더 크다. 연평도 사건 이후 더 급박해진 위기상황 때문일까. 십년 전 서해상에서 남북간 충돌이 발생했을 때 ‘북방한계선’의 의미와 성격을 분명하게 밝혀주신 선생님은 이 상황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지 않았을까.
서둘러 빈소를 찾고 싶었으나 자신을 광고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을 것 같아 미루고, 대신 오랜만에 선생님의 책을 몇 권 꺼내서 두서없이 읽기 시작했다. 이내 특유의 치밀하고 견실한 문장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는 행복을 누렸다. 낯익은 문장이 대부분이지만, 다시 보니 의미가 새롭고, 세월에 관계없이 지금도 생생한 현실성을 갖는 표현과 생각이 풍부했다.
리영희는 탁월한 언론인,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내가 그의 글에 매료된 것은 무엇보다 그의 힘차고 정밀한 문체 때문이었다. 실제로 지금도 별로 변하지 않았지만, 우리 세대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직업적 문필가들의 문장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절대로 본받을 만한 게 아니었다. 새 세대의 감수성을 표현한다는 글들이 매우 비논리적이거나 감상적인 문체였다. 그 상황에서 리영희라는 한 외신기자의 문장은 나와 같은 문학도가 질투를 느끼며 흉내를 내고 싶은 극히 모범적인 것이었다. 무엇보다 리영희의 문장에는 지적 태만과 후진성의 징표라고 할 수 있는 쓸데없이 현학적인 표현이 없었다. 자주적인 사고와 판단력으로 사태의 근저를 집요하게 파헤쳐 진실에 이르고자 하는 강인한 지적 체력에서 리영희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실제로 그의 글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은 단순한 지적 훈련이 아니라 험한 세월의 굽이굽이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한 양심적인 지식인의 전인격이 뒷받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박경미 교수의 말처럼 “그 일생 자체가 한국 현대사의 결정판이자 사회적 전기(傳記)”라고 할 수 있는 리영희의 생애는 가장 수준 높은 지식인의 일생이었다. 지식인이란, 리영희 자신의 정의에 의하면, 자주적 정신과 양심에 의거하여 인류의 보편적 이상에 충성하는 ‘자유인’이다. 근 50년에 걸친 치열한 언술활동, 그리고 그로 인한 끊임없는 수난은, 본질적으로 이 자유인의 ‘자유’를 행사하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인간적 위엄을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리영희에게 그것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자, 억누를 수 없는 생리적인 욕구였다. 군사통치하에서 그는 무엇보다 “생리적으로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고통을 느꼈던 것이다. 그가 가장 혐오한 것은 노예의 삶이었다.
그러나 리영희가 바란 것은 결코 이상향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인간의 이성을 신뢰했으나 이성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바란 것은 “최소한의 도덕성이 통용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였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남북한 어디서든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은 몰상식과 비이성이었다. 민주정부 십년 동안에도 그는 권력에 비판적이었다.
리영희의 생애를 관통한 것은 철저한 무사(無私)의 정신이다. 20대 통역장교 시절 진주기생 앞에서 객기를 부리다가 자신의 왜소함을 자각했다는 유명한 일화는 그의 지적·정신적 강인성을 뒷받침하는 근본 에너지가 무엇이었던가를 짐작게 한다. 그것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근원적 겸허함, 소박함이었다. 비슷한 연배였던 장일순을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인간이 리영희였다. 장일순과의 교유 탓도 있겠지만, 만년에 이를수록 리영희는 ‘문명’의 위기 증상에 예민한 관심을 드러냈다. 부탁도 드리지 않았는데 <녹색평론>에 원고를 자진해서 보내주신 것 등은 그런 관심의 표명이었을 것이다. 리영희라는 위대한 정신이 남겨놓은 사상적 유산은 크고 깊다.
-김종철 〈녹색평론〉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