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그 하루의 상념

체 게바라 2010. 1. 23. 17:30

 

"건물들이 쭉쭉 올라 가겠지. 여기 사람들은 잊혀지고, 사라진 채….” 문정현 신부는 이 말끝에 <한겨레21> 기자 앞에서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무작정 짐을 싸 상경해서 용산 ‘남일당 본당 신부’로 부임한 지 11개월 만의 일이었다.

 

대통령도 눈물을 흘렸다. 1월8일치 신문에서 보았다.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한 모녀의 사연을 들으며 대통령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어냈다. 우리는 재산도 많고, 전과기록도 많고, 거기에다 눈물까지 많은 대통령을 두었다. 어찌 복된 일이 아니랴만, 희떠운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 눈물을 어묵“건물들이 쭉쭉 올라가겠지뻥튀기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했다. 급식 지원 예산이 줄어들어 한달 4만~5만원 급식비가 힘겨운 아이들 몇을 끝내 잘라내야 하는 고통스럽고 짜증스러운 일을 몇 번 겪다 보니 이렇게 대통령의 눈물을 빈정거리는 못된 심성이 길러졌다.

 

일흔 살 노인을 도심 테러리스트로 몰고, 그 아들을 아버지를 불태워 죽인 패륜아로 만들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그 ‘법치’를 내던지면서 범죄자 하나를 ‘원터치’로 사면복권시켰더니, 그의 첫마디는 ‘사회 각 분야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였다.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고, ‘깨어나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았고, ‘정신 차리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용산 재개발로 삼성, 대림, 포스코와 같은 기업들이 거둘 것으로 예상되는 1조원대의 개발이익과 이 참사의 연관관계에 대해서는 이제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워낙에 당연한 일이니까.

 

지난 토요일, 서울역 앞 광장에서 치러진 영결식에 다녀왔다. 다섯 분의 넋들을 배웅하면서 지난 1년간 내 마음속에 쌓인 마음의 빚을 털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석 모란공원으로 가게 되면 문익환 목사님이 제일 먼저 두 팔 벌려 맞이하시고, 계훈제 선생님이 마중하실 터이니, 유가족들 너무 걱정 마시라고 이한열의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모란공원의 터줏대감 전태일이 열 살 연상의 이상림 할아버지를 얼싸안고 ‘형님’ 하면서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혼자 울컥했다. 그리고 전재숙 여사가 유가족을 대표해 인사 말씀을 하시다 오열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었다.

 

그러나 나는 자꾸 뭔가가 거슬렸다. 다섯 시신을 모신 단상 뒤편으로 엄청나게 큰 총천연색 전광판이 영결식장을 내려다보면서 끝없이 명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예쁜 여배우가 노트북을 애인처럼 어루만지고, 기다란 남자배우가 얇디얇은 텔레비전을 쓰다듬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우리 지역으로 놀러 오시라는 도지사·시장·군수들이 쉴새없이 등장하는 저 거대한 전광판의 번쩍거림은 꼭 이 자리를 굽어보는 물신(物神)의 시선 같았다.

 

화장실 간다고 영결식장을 잠시 벗어나 서울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나는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에 잠시 빠져들었다. 바깥의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영결식장 인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지금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지 않다는 듯 재바른 걸음으로 오고 가고 있었다. 별다른 유감은 없었다. 다만 영결식에 참여한 우리가 실은 이 물신의 영토 한가운데에 고립된 ‘내부난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던 것이다.

 

그날도 몹시 추웠다. “여행을 떠나듯/ 우리들은 인생을 떠난다”는 신동엽의 시구절을 생각하면서 나는 다섯 분의 명복을 빌었다. 이제는 편안하실 것이라고, 그 뜨거웠던 화염의 기억을 지웠다. 눈물 많은 우리 대통령과, ‘정신차려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한 기업인과 내부난민으로 고립된 우리들과 이 시대의 지독한 공기를 생각하며 나는 서울역에서 용산 남일당까지 천천히 걸었다. 1월9일, 그 하루의 상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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