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까뮈의 실존주의 - “부조리에 저항하라”
<페스트>, <시지프스의 신화>의 작품을 중심으로
말 그대로 ‘하늘 없는 공간, 깊이 없는 시간’과 싸우는 끝없는 바위산으로의 바위 올리기 형벌을 받은,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시인 호메로스가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이라고 평했다는 시지프스에 대하여 까뮈는 그의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신들이 생각한 것은 일리 있는 일이었다.“라고 썼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무대 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져 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까뮈는 현대인들의 권태롭고 전망 없는 일상이 시지프스의 무용하고 희망 없는 형벌과 같다고 정의 한다. 힘들여 밀어올린 바위가 항상 곧바로 굴러 떨어져 다시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그 힘겨운 노동, 그리고 결국에는 삶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까뮈는 현대인들의 삶도 결국은 시지프스의 삶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까뮈는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저항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실존주의의 철학적 태도를 설명했다. <페스트>, <이방인>, <시지프스의 신화> 등을 포함한 그의 모든 작품 속에서 삶의 부조리성, 무의미성에 대하여 그 어떤 타협이나 도피를 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여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 특히 그의 <페스트>는 500만부 이상이나 팔려 베스트셀러를 설명하는데 이 작품을 예로 든 프랑스어 사전까지 있다고 한다. <페스트>는 프랑스 영토인 알제리의 오랑이라는 도시에서 무서운 전염병인 페스트가 발생하면서 시작한다. 시에서는 페스트의 밖으로의 전염을 막기 위해 도시를 봉쇄한다. 따라서 이 도시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갑자기 갇혀 사랑하는 사람과 생이별을 하고, 절망속에서 결국 생명마저 잃게 될 상황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페스트란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모든 종류의 폭력과 강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또한 인간의 삶에 도사리고 있는 절망, 곧 죽음에 갇혀 삶과 세계에 대해 어떤 희망이나 의미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저 살아야만 하는 ‘부조리’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까뮈가 말하는 부조리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전적 의미로 부조리란 조리에 맞지 않음, 비합리적임, 이성에 의해 파악되지 않음을 뜻한다. 그러나 까뮈는 ‘세계와 그 안에서의 삶이 가진 이해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우리는 세계와 인간이 존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음을 말한다. 바로 인간이란 세계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묻는 유일한 존재자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물도(인간이 아닌 그 어떤 동물, 식물)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존재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가장 큰 문제로 삼고 있는 존재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작 그렇게 간절하게 존재의 의미를 묻고 있는 우리 인간들이 그것에 대해 도대체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때 ‘알 수 없다’라는 말의 의미는 모른다가 아니라 무의미라는 것이다. 즉 자신과 세계가 존재하는 의미가 있기는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없음은 아예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까뮈는 ‘단 하나의 의미조차’ 찾지 못했다고 탄식한다. 따라서 ‘삶과 세계의 무의미성’ 또는 간단히 ‘존재의 무의미성’이 바로 부조리라는 말이 가진 진정한 뜻이 되기에 페스트를 위와 같이 부조리나 삶의 무의미성으로 바꾸어 부르면 분명한 뜻이 드러난다.
<페스트>는 기자 랑베르와 신부 파눌루, 의사 리유 이 세 사람이 끌고 간다. 아랍인들의 생활을 취재하러 잠시 오랑에 온 신문기자 랑베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곳을 벗어나려 한다.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죽음의 도시에서 벗어나 연인이 기다리는 파리로 돌아가 행복을 찾으려는 것이다. 여기서 랑베르는 부조리 앞에서 안일한 일상으로 도피하려는 일반적인 인간의 태도를 상징한다. 파눌루 신부는 페스트가 사악한 인간들에게 신이 내리는 징벌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재앙이 오히려 악인과 선인을 갈라놓는 길을 제시할 것이라는 부질없는 희망을 갖는다. 즉, 신부는 부조리 앞에 헛된 희망을 갖는 인간을 상징한다. 그리고 의사 리유는 파눌루 신부의 이러한 태도를 비난하며, 침묵하고 하늘만 쳐다보는 대신에 있는 힘을 다하여 페스트(부조리)와 싸우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동료 타루와 함께 ‘보건대’를 조직한다. 바로 리유야말로 부조리에 저항하는 인간의 태도를 상징한다.
부조리 앞에 인간이 흔히 취하는 태도는 자살과 희망이다. 까뮈는 희망이란 자기기만으로서 부조리에 대한 정당한 대처방안이 아니라 ‘치명적 회피’, ‘투쟁의 기피’, ‘기권’ 혹은 ‘철학적 자살‘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자살은 죽음과 함께 부조리의 끝이 아니라 부조리의 소멸일 뿐, 해결이 아니라는 것이다. 까뮈는 부조리에 대한 대처로 저항, 혹은 반항을 제시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방법이라는 것이다. 까뮈는 <페스트>에서는 의사 리유를 제시했고, 시지프스를 들었다. 시지프스란 본래 신들에게 저항하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신들이 시지프스에게 내린 형벌은 부조리, 무의미한 삶이었다. 그런데 시지프스는 이 부조리한 삶에 저항이라는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형벌로부터 벗어났으며 이를 통해 신들에게마저 승리했다는 것이다.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바위 올리기를 하는 형벌에 투항하지 않는 모습에 지쳐가는 것은 결국 시지프스가 아니라 신들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주는 인간의 삶은 신들마저도 더 이상 인간을 무의미(부조리)하게 할 수 없으므로 신들에 대한 시지프스의 승리라는 것이 까뮈의 주장이다.
<페스트>에서도 마찬가지다. 신문기자 랑베르는 리유를 찾아와 떠나지 않고 리유를 돕겠다고 말한다. 파눌루 신부도 태도를 바꾸어 리유의 보건대에 참여하지만 병으로 죽는다. 페스트가 물러가고 오랑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나 마지막 희생자들이 생긴다. 타루가 쓰러지고, 요양소에서 치료 중이던 리유의 아내가 죽었다는 전보가 도착한다. 이것은 부조리란 꾸준히 살아남아 또다시 인간들의 삶의 무의미성과 부조리를 흔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고, 병균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건강이란 의지의 소산이기 때문에 절대로 마음을 해이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타루의 말을 통해 강조한다. 그러므로 삶의 무의미성, 부조리를 극복하는 즉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는 인간의 유일한 해답, 그것은 바로 저항, 반항뿐이라고 까뮈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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