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기적을 기다리며 - 마리노 마리니

체 게바라 2007. 10. 21. 15:06

 

 


 

“우리 시대는 비극적입니다. 나는 평온할 때조차도 그 평온함이 계속 유지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죠. 그렇기에 나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 속에는 비극에 대한 경고가 들어 잇습니다. 이 비극적으로 전개되는 우리 시대에 대한 이야기 속에 말이죠.“ 마리노 마리니는 이탈리아 조각가로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헨리 무어와 함께 20세기 구상조각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특히 기마상과 여성의 누드, 초상 조각으로 유명한 조각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마리노 마리니의 전시전이 지난 2월 14일부터 4월 22일까지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렸었다.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경험하고 그러한 비극의 원인이 인간으로부터 초래되었다고 판단했던 마리니는 이러한 불안의 시기에 인류가 직면한 비극적 상황을 작품 속에 담아내고자 한다. 그는 불안과 고통의 20세기를 살며 자신이 통찰한 인간성과 이 시대가 드러내는 비극성을 작품을 통해 승화시켜 내었다. ‘기마상’ 조각을 통해서는 불안과 고통의 세기인 20세기에 인간이 직면한 비극을, ‘초상조각’을 통해서는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개별적인 인간의 초상을 통해 구현된 시대의 초상을, 마지막으로 비극의 시대에도 여전히 자신이 갖는 치유의 힘을 믿고 그에 대한 신뢰를 드러낸 ‘포모나 연작’을 통해서는 기적을 기다려야 할 정도의 비극적인 불안 속에서도 희망의 싹은 여전히 존재함을 느낄 수 있다.



 


포모나. 풍요로운 안식처

마리니의 여성누드는 행복과 재탄생을 의미하는 이미지이다. 그의 여성누드는 단순히 <여성누드>라고 이름 붙여지거나 혹은 <작은 유디트>처럼 특정한 이름이 붙여지기도 하지만 <포모나>로 이름 붙여진 여성누드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포모나 이외의 제목을 가진 작품이라 하더라도 둥글게 부풀어 오른 배와 커다란 가슴이라는 조형적 공통점을 보여준다. ‘포모나’는 고대 에트루니아의 여신이자 풍요를 기원하는 모신(母神)으로서 영원한 여성성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형상이다. 마리노 마리니가 제작한 대부분의 누드는 포모나로 분류할 수 있다. 그중 1941년의 포모나는 마리니의 나부상 중 가장 크게 제작되었으며 그의 여인상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이 작품의 여체는 고대의 항아리 앙포라를 연상시키는 풍성한 엉덩이와 신체의 풍만함을 드러내면서 단단한 골격을 드러내고 있다. 둥글고 높게 부풀어 있는 그녀의 가슴은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답게 매우 경이로운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육감적이지만 고전적인 격조와 품위를 느끼게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 풍요롭고 성스러운 형상의 ‘포모나’는 이제 막 도래할 비극의 시대를 향해 멈춰버린 마지막 행복의 시간을 의미하는 듯하다.


1950년대 그려진 마리니의 회화작품에서는 피카소의 큐비즘적인 요소를 강하게 느낄 수있다. 가령, 몸과 분리되어 가면처럼 보이는 얼굴, 짙은 블루의 비현실적이면서도 강렬한 파란 색의 인체, 인물의 어색한 비례, 그리고 배경에 간혹 등장하는 텍스트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요소를 종합한 작품이 <바닥>이다. 왼편에는 다소 우스꽝스러워 ‘곡예사’로 추측되는 인물이 서 있으며, 오른편에는 풍부한 살집을 지닌 누드의 여인이 서 있다. 피카소의 작업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마리니가 다양한 장르와 유파를 실험하고 자기화하였다는 유추를 가능하게 한다.


진동하는 색채, 회화

“나는 색채에서 출발했다. 색채는 나에게 생기를 주었으며, 사물에 대한 상상력을 불어넣어

준다.“ 마리니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단색과 원색으로 칠해진 추상작업이 주를 이루었는데 그 중 1967년 그린 <구성>은 다른 작업에 비해 완연한 추상이라기보다는 입체주의나 미래주의를 연상케 한다. 화면에서 보이는 둥글고 날카로운 기하학적인 도상들은 이 시기 조각 작품에서 보이는 추상적인 형태와 연결된다. 이 작품은 특정한 소재를 탐구하였다기 보다는 색채에 대한 마리니의 관심에서 제작된 작품으로 그가 즐겨 쓰는 짙은 파란색과 붉은 색, 그리고 기하학적인 요소를 드로잉 하듯이 배치시키고 있다. 



 


이카루스의 추락과 슬픈 대지, 말과 기수

‘기마상’이라는 테마는 동, 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 예술적 주제로 많이 다루어져 왔다. 중국 진시황의 부장품, 우리나라의 기마인물상, 파르테논 신전의 청년 기마상 등 다양한 의미와 형태로 기록되어 오고 있다. 이런 면에서 기마상이라는 테마는 결코 새롭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마리니는 기수를 영웅화 시키거나 기념비적으로 만드는 서양미술사의 전통적인 문맥에서 벗어나 평범한 인간 그 자체를 주인공으로 함으로써 기수의 익명성을 전제로 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마리니의 ‘말과 기수’는 기마상이라는 서양미술사의 오랜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말 위의 인간을 영웅화하는 위압적인 구성이기보다는 인간과 말 사이에 이루어진 조화로운 상태를 형상화 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말과 기수’는 전쟁을 겪은 후 역사적 모순에 직면한 인류의 불안과 슬픔을 담아내게 되는데, 조화로움을 간직하면서도 말 머리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곧고 긴장된 선을 통해 비극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말과 기수는 20세기를 불안의 시대로 정의한 마리니의 시대인식의 변화과정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소재라 할 수 있다.


마리니의 사람들, 초상조각

화가로 출발한 마리니는 초상조각을 통해 본격적인 조각가의 길로 접어든다. 그가 조각을 시작한 1920년대는 다양한 경향의 추상미술운동이 화단을 풍미하던 때로, 대상을 닮게 재현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초상조각은 주목받지 못하던 때였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거친 그는 대상을 닮게 재현하기 보다는 이제 인물의 내면세계의 형상화에 주력하게 된다. 그는 동시대의 조각가 제르맹 리시에의 초상을 제작하였는데 얼굴의 턱 바로 밑 부분에서 목을 잘라 막대에 꽂아 놓음으로써 섬뜩한 느낌을 주는 ‘두상’에서 비인간적인 현대의 초상을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얼굴 부위의 거친 처리와 표면은 이 작품 주인공 제르맹 리시에가 자신의 작품 <폭풍우 인간>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비이성적인 인간성을 폭로해낸 것에 대한 화답으로써, 동시대 작가에게 느낀 공감ㄷ대의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리니는 1950년대 뉴욕 전시회에서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를 만난 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초상>을 제작했다. 이 작품이 마리니의 작품 중에서 걸작에 속하는 이유는 단순히 외형을 묘사하기보다는 작가가 주인공에게서 느낀 독특한 분위기를 통찰력 있게 포착해냈기 때문이다. “스트라빈스키는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며 직관력이 뛰어난 인물이다. 그에게 마음이 끌린 것은 그가 발산하고 있는 활력과 감수성에서 분출하는 힘 때문이었다. 그는 인생 전반에 걸친 고난에도 불구하고 매우 생동감 넘치고 예리하며 사려 깊어서 내게 굉장한 기쁨을 주었다.”라고 회고하고 있는데. 이러한 언급을 통해 마리니의 <스트라빈스키의 초상>에 대한 애정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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