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이 비행기가 서울로 바로 못갑니다”
“이 비행기가 서울로 바로 못갑니다”
[윤태영의 기록15-2004년 12월] 자이툰 부대 방문
윤태영 전 참여정부 청와대 부속실장
12월 초, 대통령은 2004년 후반기의 기나긴 순방 여정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와있었다. 9월부터 시작된 해외순방은 사실상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일정이었다. 그동안 방문한 나라만 해도 11개국에 달했다. 프랑스 파리의 영빈관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대통령은 이라크 아르빌 방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쿠웨이트와 이라크 정부에 보내는 서한에 서명했다. 이라크 방문은 대통령의 안전 문제를 고려하여 극비리에 추진되어온 계획이었다. 프랑스 방문 일정을 마치는 대로 그가 탑승한 전세기는 곧바로 쿠웨이트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그곳의 공항에서 비행기가 머무는 동안 그와 소수의 일행은 군 수송기를 타고 이라크 아르빌로 날아가 한국군 파병부대인 자이툰을 위로 격려할 예정이었다. 일정이 임박한 만큼 필요한 최소한의 외교적 절차를 밟기 시작해야 했다. 암호명 '동방계획'이 막 실행단계에 접어든 것이었다.
실행단계 접어든 암호명 ‘동방계획’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권진호 안보보좌관은 대통령이 서명한 서한을 돌려받은 다음, 인사를 마치고 방을 나갔다. 궁금한 표정의 권양숙 여사가 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무슨 계획이지요?”
머뭇거리던 내가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다가 대답을 했다.
“아, 예. 프랑스 방문이 끝나는 대로 귀국하는 도중에 이라크 자이툰 부대를 격려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여사님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런 계획을 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런 계획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실행단계까지 와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는 모습이었다. 당황해하는 여사님의 표정을 보자 곤혹스러웠다. 나는 대통령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괜히 걱정하게, 그런 이야기를 뭣 하러…….”
여사님의 질문에 거짓말로 대답할 수도, 그렇다고 모른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부속실의 다른 직원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보안이 특별히 강조된 일정이라 순방을 함께 수행한 직원들 중에서도 일부만이 '동방계획'을 공유해왔다. 나는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마지막 점검회의가 곧 열리게 되어 있어서, 가봐야 되겠습니다.”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자리를 떴다. 여사님의 표정에서 우려와 걱정이 진하게 묻어나오고 있었다.
이십여 일 전인 11월 13일, 남미 순방을 위해 출국한 대통령 일행은 중간에 미국 LA를 들렀다. 그곳에선 동포간담회가 열렸다. 대통령은 특유의 입담으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대통령이 왜 힘이 없냐고 하는데, 대통령은 힘을 좀 빼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반대로, 정정당당히 경쟁하지 않고 반칙하는 일을 뿌리 뽑는 것은 강력히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모두가 법으로부터 보호받고 함께 만든 규범을 존중하면서 공정하게 경쟁하는 사회 문화를 만드는 데 집중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연설이 끝나자 행사에 참석한 교민 몇 사람이 대통령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그 가운데 하나, 이런 질문도 있었다.
“대통령께서 직접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를 위문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대통령은 교민들의 질문에 비교적 소상하게 답변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구체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질문 자체를 잊은 것인지, 의도적으로 답변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회피하는 일이 거의 없는 대통령이었다. 어쨌든 그런 가운데 대통령의 답변은 끝났고, 행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런 질문이 있었다고 특별히 기억하는 사람도 없는 듯 보였다.
“보안이 깨지면 깨지는 대로 가야지요”
얼마 후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낸 것은 남미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대통령 자신이었다. 귀국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유럽 순방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강행군이었다.
그는 부속실장인 나를 불러 NSC에 지시를 내릴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했다. 유럽을 방문하는 계기에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는 파병부대를 위문하겠다는 것이었다. 일정은 유럽 순방이 끝나는 시점으로 결정되었다. 참모들은 긴장했다. 보안이 제대로 지켜질 수 있을까에 대한 우려가 가장 컸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보안이 깨지면 깨지는 대로 가야지요.”
12월 초, 폴란드를 거쳐 프랑스에 도착한 대통령은 이라크 아르빌 방문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예정된 아르빌 방문 시간에 맞추기 위해 프랑스에서 일정이 반나절 연장되었다. 일정 변경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이나 수행원들은 이상한 기미를 눈치 채지 못했다. 늘어난 체류 시간을 활용하여 대통령 내외는 퐁피두센터를 방문했다. 늦은 저녁, 마침내 대통령이 탑승한 전세기는 파리의 드골 공항을 이륙했다. 비행기가 안정 고도에 진입하자마자 그가 직접 기자들 앞에 나섰다.
“여러분, 라오스에서 파리까지 정말 수고가 많았습니다. 참 힘들었지요? 여러분 보기에는 어떤가요? 잘된 것 같은가요? 표정으로 읽을게요. 그냥 최선을 다했다, 크게 차질은 없었던 것 같다, 생각했던 것만큼은 했다고 자평하고 싶습니다. 서울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는데…… (잠깐 포즈를 취한 뒤) 참 여러분한테 좀 이렇게 미안한, 양해의 말씀을 하나 구하고 싶습니다. 뭐라고 하지? (약간 주저하면서)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이 비행기가 서울로 바로 못갑니다. 쿠웨이트에 들러서 여러분들이 쿠웨이트에서 좀 지체해주시고, 저는 그동안에 여러분 중 몇 분과 아르빌을 다녀와야겠습니다. 그동안 공개하지 않고 여러분한테 협력을 구해 비공개리에 부대 배치가 완전히 끝났습니다. 그래서 장병들이 안착했기 때문에 연말을 기해 아무래도 제가 가서 한번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기왕에 파병을 해서 우리 장병들이 수고를 하는데 그리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쿠웨이트에 도착해서 우리 군용기로 갈아타고 아르빌에 새벽에 도착합니다. 장병들과 아침을 같이 먹을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장병들을 격려하는 프로그램을 하고 다시 여러분과 합류해 (서울로) 갑니다. 8일 도착한다고 기사들을 썼을 텐데 (웃음)…… 그 오보는 국민이 다 양해하고 받아주지 않겠습니까? 좀 힘들더라도 빨리 송고하고 싶으실 텐데, 아르빌에서 돌아올 때까지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지요. 자세한 것은 국가안보보좌관이 설명해주시구요. 잘 부탁합니다.”
전세기는 12월 8일 새벽에 쿠웨이트의 무바라크 공항에 착륙했다. 사막지대라 더운 날씨일 것으로 예상했지만 생각보다는 건조했다. 대통령과 수행원, 그리고 풀기자들이 군용기로 옮겨 탔다. 새벽 다섯 시에 이륙한 군용기는 830km를 2시간 20분 동안 날아 아르빌 공항에 도착했다. 지급된 방탄조끼를 입으면서 수행원들의 분위기도 긴장으로 바뀌었다.
공항에서 다시 차량 편으로 20분을 달렸다. 자이툰 부대에 도착한 시각은 아침 7시 15분. 대통령은 아침 식사를 장병들과 함께했다. 파병 결정과 관련하여 커다란 불편함이 그동안 대통령의 마음을 짓눌러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 부담을 덜어내려는 듯 그는 장병들에게 힘차게 이야기했다.
짓눌러온 부담을 딛고, 우리 군을 믿고
“처음에 파병할 때 고심을 많이 했다. 명분 또 국익, 그 다음에 안전. 다 각기 기준이 달라서 논란은 많이 있었지만 어떻든 안전이라는 측면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공통의 관심사여서 걱정 많이 했다. 여러분의 선배들이 내게 자신을 갖게 해준 말이 있다. '우리 군이 가서 위험에 처하는 경우는 주민들로부터 불신을 받을 때이고, 친근하게 결합했을 때는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군은 그런 점에서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세계 어느 나라 군대보다도 잘한다. 어디 가더라도 한국군 스스로의 안전을 지키면서 임무를 120%, 150% 수행할 것이다. 믿고 결단을 내려달라'고 조언을 하더라. 해외파병 다녀온 지휘관들이 그랬다. 나도 그걸 믿었다. 실적이 있었으니까. 오늘 와서 보니 또 한 번 우리 군의 능력이 증명되는 것 같다. 현장을 보면서도 느낌이 있고 사단장 보고와 영상보고를 보면서 받은 느낌이 있다.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짧은 대화를 나누면서 정말 실감이 나고 확신을 갖게 됐다. 여러분, 참 장하다. 여러분이 계속 보람을 갖고 꼭 성공해 달라.”
자이툰 방문을 마친 대통령 일행은 쿠웨이트 무바라크 공항으로 돌아온 후 기자들의 기사 송고를 위해 한 시간 더 그곳에 머물렀다. 이 행사를 끝으로 그는 라오스와 유럽 3개국 순방 일정을 마무리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서울공항에 도착한 것이 12월 9일 새벽 4시 40분. 귀국해보니 여론이 바뀌어 있었다. 대통령에 대한 칭찬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보수언론까지도 칭찬 일색이었다. 더불어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도 급상승했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감동'을 이야기했다. 그는 멋쩍은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렇게까지 기대를 한 것이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