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윤태영의 기록-13] 변화와 금기에 대한 도전
윤태영 전 참여정부 청와대 부속실장
호기심이 많았다. 사물에 대한 궁금증도 많았다. 관저를 나서 본관까지 걷는 길, 눈에 들어오는 나무 한 그루와 풀 한 포기에도 관심이 많았다. 낯선 풀을 보면 이름을 알려고 했고, 이름을 알면 특성을 파악하려 했다. 자연이 그를 자극했고 그는 세상에 반응했다.
인간 노무현은 항상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고민하지 않으면 무슨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앉은 자리에서 풍화되는 바위라기보다는 쉴 새 없이 산과 들을 흐르는 물이었다.
그는 앞서 나갔다. 참모들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쉽게 흉내를 낼 수 없는 경지였다. 몸이 편한 것을 추구할 법도 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더욱 그랬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부족했다. 굳이 새로운 주제를 내놓고 시비를 벌이지 않아도 충분할 듯싶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논쟁의 한가운데로 끌고 갔다. 현실을 바꾸겠다는 강한 의지가 그 이면에 있었다.
굳이, 먼저, 스스로…
고시공부를 하던 시절, 그는 독서대를 발명했다. 몸이 힘들 때 비스듬히 누워서도 책을 읽을 수 있는 발명품이었다. 특허 등록을 했지만 실용화되지는 못했다. 정치인 시절에는 회의 참석자들이 양복 상의를 각자의 의자에 걸쳐놓는 것을 보고, 등받이 상단을 옷걸이 모양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역시 제품화되지는 못했다.
청와대에서 맞은 첫 가을, 관저 앞 나무에 열린 감을 따기 위해 그는 긴 막대의 끝에 가위를 매단 기구를 만들었다. 밑에서 줄을 당겨 가위를 작동시키는 원리였다. 만들어놓고 보니 시중에도 비슷한 장치들이 제법 있었다. 어쨌든….
1990년대 중반 그가 서울 여의도의 아파트에 살던 시절이다. 그의 집 책상 위에는 하이텔 단말기가 놓여 있었다. 컴퓨터통신사업이 시작될 무렵 그는 시범사업에 참여하겠다고 자원했고, 작은 컴퓨터 모양의 단말기가 집으로 배달된 것이었다. 그는 당시 새로운 통신수단으로 각광을 받았던 시티폰도 남들보다 먼저 사용했다.
자서전 작업을 위해 그의 집을 방문했던 날, 나는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그를 발견했다. 명함크기만한 전자수첩에 인명을 입력하고 백업을 만드는 일에 깊이 빠져있었다. 아무리 원외였지만 그래도 전직 의원이었다. 비서들도 있었다. 연락처 관리를 직접 하지 않아도 될 처지였지만, 그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장비의 성능과 효용에 대해 속속들이 파헤치고 있었다. 그 열정이 결국은 ‘노하우2000’이라는 인명·일정관리 프로그램의 개발로 이어졌다. 훗날 청와대 업무관리시스템인 이지원의 개발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큰 탈이 없는 일들이었다. 프로그램을 구입해 쓰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새로운 것을 체득하려고 했다. 그렇게 얻은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일상과 업무를 변화시키려고 했다. 정치도 마찬가지였다.
13대 국회의원이던 시절, 그의 사무실은 의원회관 다른 직원들이 부러워하는 대상 가운데 하나였다. 의원과 비서진의 끈끈하면서도 스스럼없는 관계 때문이었다. 노 의원실의 분위기는 자유로우면서도 치열했다. 그러면서도 효율적으로 보였다. 그런 분위기 탓인지 청문회 등 의정활동에서도 그는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래도 권위적 분위기가 국회의 공기를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노 의원실의 파격적인 분위기는 작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또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었다.
제16대 대통령으로서 노무현은 청와대의 분위기를 바꾸는 데에도 진력했다. 그는 백악관을 소재로 다룬 미국 드라마 ‘웨스트윙(West Wing)’을 수시로 이야기했다. 그 모습을 대한민국의 청와대에서도 구현하고 싶어 했다. 엄격하고 엄숙한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기존의 공직사회 분위기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모색이었다. 그는 그렇게 항상 변화에 도전했다. 금기에 도전했다.
고정관념 없이, 솔직하게
그에게는 흔하디흔한 선입관이 없었다. “정치는 이래야 한다, 국회의원은 또 대통령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없었다. 초선의원 시절, 현실과 괴리감을 견디지 못하고 사표를 던진 것이 어쩌면 그 시작이었다. 정치인으로서 미래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따라갔어야 할 3당합당에 반대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 1990년 2월 3일 3당합당을 반대하는 부산시민대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노무현 의원
이후 야권통합으로 출범한 통합민주당에서 그는 대변인 직책을 맡은 상황에서도, 자신에 대해 왜곡보도를 한 조선일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어떻게 대변인이…”라는 주위의 만류를 그는 끝내 뿌리쳤다.
1994년에 자서전 ‘여보 나 좀 도와줘’를 펴내기 위해 구술을 하던 때의 일. 그는 변호사 개업할 당시를 회고하면서 어떤 아주머니로부터 수임료 60만원을 떼어먹다시피 했던 일을 가장 먼저 스스럼없이 고백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부부싸움 등 지난 시절 편협했던 자신의 여성관도 솔직하게 구술했다. 출판사 입장에서 오히려 부담을 느낄 정도였다. 그는 그대로 출간해줄 것을 주문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정치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솔직한 자서전’으로 차별화되었다.
대통령후보 경선을 준비하던 캠프의 참모들은 걱정이 하나 있었다. 대통령이 되려면 노무현 후보가 한번쯤은 미국을 다녀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일관되게 반대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캠프에서 유일한 반대론자였다. “미국을 다녀와야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 일관된 입장이었다. 한 술 더 떴다. 그는 강연을 할 때마다 “참모들은 방미를 권하고 나는 반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했다. 득표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는 캠프의 우려가 무색할 정도였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금기에 대한 도전’은 계속되었다. 오히려 더욱 치열해졌다. 그는 ‘대통령다움’으로 표현되는 권위적이고 형식적인 문화를 바꾸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언론의 거듭된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으로서 무게를 고집하지 않았다. 서민적 표현을 즐겨 사용했고 형식적인 의전을 거부했다. 한편에서는 검찰이나 언론 등 기존의 권력들과 담을 쌓거나 갈등 관계를 유지했다. 지지도만을 염두에 둔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어려운 도전이었다.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서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그의 롤 모델 가운데 하나였다. 롤 모델은 아니었지만 그가 주목한 대통령이 또 있었다. 미국 7대 대통령
인 앤드류 잭슨이다. 그는 사석에서 잭슨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미국의 경우 건국 초기에 대통령을 역임한 워싱턴, 제퍼슨, 해밀턴 등은 모두 엘리트 귀족이다. 7대에 가면 잭슨이 대통령이 된다. 초등학교도 못 나온 이 사람은 특이하게 결투도 좋아하고 돈도 좋아한다. 부도를 낸 적도 있다. 상대 후보의 관을 메고 선거운동을 하는가 하면 대통령 취임식 때는 사람들이 메뚜기 떼처럼 와서 백악관을 밟고 지나갔다. 품위 있게 살던 사람들은 백악관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모욕감을 느꼈다. 당시는 1/10의 주민들에게만 선거권이 있다가 그것이 확대되는 시기였다. 1830년대 무렵이었다. 링컨 대통령이 취임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암살 정보가 있어서 다른 기차를 타고 왔는데,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뒷문으로 백악관에 입성했다’고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시대가 바뀌는 것이다. 엘리트민주주의에서 대중민주주의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2006년 2월 11일 민주평통 김해시협의회와 환담)
시시포스 신화와도 같았던 노무현의 도전.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서 변화와 금기에 도전했다. 도전의 지향점은 언제나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