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참 조화 속이다.

체 게바라 2013. 7. 7. 17:29

 

 

우리가 보고, 느끼고, 사고하는 것 모두는 현재의 세계라는 전체 지평 속에서 일어난다. 이 지평 속에서  각각의 의미는 기존 의미층의 부분적 도출에 불과하다. 의미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판단과 개입 이전에 다른 의미들과 겹쳐져 있고, 이 의미들에는 무의미를 포함하여 어떤 무의식적 층위 또한 내재한다. 체험적 내용을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로서 이미 체험의 어떤 총체적 틀 안에 있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몸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즉 체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은 이 체험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크고 작은 체험과 체험의 이어짐 속에서 우리는 하기 싫은 것을 덜 하고 할 수 있는 것을 더 하며, 하고 싶은 것을 좀더 많이 하고자 하는 가운데 어떤 다른 자신을, 어제와는 다른 생활을 만난다. 이렇게 발견된 다른 자신과 생활이 체험의 다른 내용을 이룬다. 사물의 숨겨진 배후는 여기에서 잠시 드러나고, 이런 배후로 하여 나는 지금의 나를 넘어서게 된다. 자신을 넘어서는 것, 그것은 삶의 우발성을 줄이면서 열망의 보다 많은 부분들을 필연성 안으로 귀착시키는 일이다. 이질성과의 만남 속에서 우리는 부분적 원근법의 제약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체험은 늘 다른 체험이어야 한다. 이 다른 체험 속에서 우리는 사물의 은폐된 후경, 그 숨겨진 진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늘 다른 체험이란 늘 다른 시간의 체험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있어왔던 시간의 반복이 아니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시간의 경험이다. 주어진 시간을 언제나 다른 시간으로 체험한다는 것, 다른 시간으로 체험하고자 노력한다는 태도에는 개별시간은 고립되어 있지 않다. 조금 전과 조금 후, 지금과 이 다음이 서로 이어져 있다. 그러면서 이 시간 각각은 단순히 동일한 순간의 연속이 아니라 이질적 순간의 중첩이요, 연쇄이다. 이 다른 시간들 속에서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는 서로를 향해 열려 있다. 나는 다른 시간의 체험으로 사물을, 세게를,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달리 보고자 한다. 이때 나의 세계는 현재가 과거와 미래의 지평으로 열려 있듯, 사물의 세계 또는 세계의 사물로 열려 있다. 이 열림을 통해 개인은 사회역사적 집단의 저류와 만나면서 자신의 생활지평을 넓혀나간다. 그러므로 주체와 객체, 몸과 세계는 인과적으로 또는 선후적으로 관계하지 않는다. 그것은 함께 그리고 동시적으로 존재하면서 서로를 조건짓는다.

 

다른 시간, 그리고 이 다른 시간 속의 다른 체험을 통해 사물과 주체는 근본적으로 만난다. 이 만남의 조건은 . 이미 언급했듯이, 타자에 대한 열려 있음이다. 사물은 내가 이 세계에 속해 있음으로써 내게 의미를 지닌다. 세계에 속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살아 잇음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나는 이 세계에 근본적으로 속하고, 이러한 세계에 속하는 한, 세상은 내게 의미를 지닌다. 사물은 세계 속에 거주하는 내가 있기에 나에 의해 관찰되고 또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세계와의 관계 속에 있기에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상호 관계는 사물과 사물, 사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으로 옮겨짐에 따라 정태적, 즉물성으로부터 동태적 역동적으로의 경향을 점차 강화해간다. 예를 들어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사물과 사물의 그것보다 동적이고, 따라서 더 적극적인 의미의 산출이 이루어진다. 사물과 인간의 관계는, 그것이 무생명과 생명, 무한성과 유한성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모든 관계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존재하는 제각각의 것은 자기 둘레의 타자에 관계하면서 서로 열린 채로, 열린 가운데 서로 작용하면서 있다. 사물은 다른 사물에게 그러하듯, 주체에게도 열려 있다. 이 전적인 열림이 서로 다른 주체 사이의 본원적 상호작용을 보장한다. 

 

열린 채로 세계 속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범주는 자연일 것이다. 자연은 우리의 감각 앞에 전적으로 열려 있다. 그것은 체험되는 것이면서 해석되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연은 일목요연하게 그리고 일의적으로 해석되기 어렵다. 비유는 이때 필요하다. 비유의 도움 없이 자연의 실체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렇듯이 자연 속의 사물도 또 인간도 비유와 상징에 의지하여 잠시 이해된다. 그러면서 이러한 이해는 궁극적으로 자연의 바탕 위에서만, 자연의 전체 맥락을 고려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삶의 근원적 이해, 그 근원에의 상기는 오로지 자연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시간과 체험과 지각의 개방성으로 하여 또 서로를 넘어시기도 한다. 그들은 상호초월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다. 상호초월성의 근거는 존재의 개방성이다. 

 

가령 봄의 버들가지는 일정한 대칭을 이루면서도 제각각의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이렇게 뻗어 나가면서도 서로 어울린다. 어떤 질서 속에서도 이 질서가 자유를 허용하는 것, 여기에 자연의 숨은 조화가 있을 것이다. 조화는 창조되어야 하는 것 이상으로 발견되어야 하고, 이렇게 발견될 때 그것은 다시 재창조될 수 있다. 아름다움은 어떤 극점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 극점은 조화 속의 집중이지 조화를 넘어서는 과잉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한쪽으로의 치우침이라기보다는 관계 속에서의 어떤 평형을 이룬다. 관계 속에서의 평형, 그것은 비례다. 그것도 단순히 기계적 비례가 아니라 율동적 비례, 비례 속의 리듬이다. 이 율동적 비례는 개별 부분들이 일정한 균질성에 도달할 때, 균질성 속에서 서로 독립적일 때 가능하다. 균질성의 대칭을 통해 사물은 객관적 녕료성을 획득한다. 아름다움은 이 명료성의 산물이다. 물론 아름다움은 명료성 이상으로 모호성 위에서도 자리한다. 기러나 이때의 모호성은 전적인 불투명성이 아니라 제어된 모호성, 그러니까 질서지어진 모호성이다. 혼돈은 전적인 불투명성에 대한 이름이다. 자연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혼돈 속에서도 우리에게 이해 가능한, 그리하여 그와 더불어 살만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