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나는 서 푼의 부나 얄팍한 명예를 위해 가슴 뛰는 존재의 삶을 포기할 수 없다.

체 게바라 2013. 7. 1. 23:54

 

 

불혹이나 지천명이란 나이를 지나기 전, 나는 이 나이에 다다르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 얼마나 신념이 굳어야만 미혹되지 않을 것인지, 어떻게 해야 세상을 보는 경륜이 풍부해지고, 하늘의 뜻을 깨달아 거스르지 않을 수 있는지 도저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나이가 지나면서 나이 마흔은 흔들림이 없는 신념의 연령이 아니라, 온갖 아집에 빠져 요지부동인 연령이라고 규정했고, 나이 쉰은 세상사의 불가항력에 백기 투항하여 그 결과로 요령부득의 늪에서 생존의 허우적거림을 당장이라도 멈추면 모든 것이 끝장인 상황으로 정리했다. 그렇게 내 나이 사십과 오십은 무감각과 타성, 비정한 현실과의 부조리한 타협이라는 내밀한 관성적 슬픔의 순간으로 지나갔다.

 

문제는 듣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이순(耳順)의 나이가 나의 코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서생적 삶을 지향한다고 했지만 지나온 내 삶은 그저 비루하고 누추하기가 볼썽사나웠다. 게다가 겨우 깨달음으로 남은 것은 인간은 자신이 알고, 믿고, 행하는 것에 단지 희생될 뿐이라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내 삶의 절반 이상은 나 뿐만 아니라 가족과 다른 사람들을 자주 실망시키는 과오가 태반이었다. 더 슬픈 일은 이런 과오에 대한 회한마저도 곧 휘발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우습게도 여전히 나는 눈을 감는 날까지 살아있다는 것과, 살아갈 것이라는 것을 겨우 인식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나를 가장 큰 슬픔에 빠뜨리는 것은 이런 상태를 지속하다가는 내 실존의 현실이 심각하게 훼손된다는 데 있었기에 이제는 살아도 그냥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한탄과 부정이 겹쳐 삶에 대한 투정으로 굳혀질 즈음 천둥같은 각성은 그렇게 왔다. 살아있다는 기쁨을 북돋우지 못한다면 다른 것들은 내게 아무 것도 소용이 없다는 무가치론이었다. 더우기 이런 투정과 한탄과 슬픔의 순간에도 나는 소진되어 간다는 진리.  나는 늙어가고, 내 생명은 조금씩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소중한 것은 내가 여기 있음이고, 나는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였고, 다른 것은 모두 가짜였다. 따라서 나는 내일부터 당장 내 삶의 경이를 새롭게 발견하는, 발견하려는 일에 매진할 것이다. 정말 근원적이고 가슴뛰는 일은 존재의 삶, 더 나아가 실존의 삶을 사는 일이다. 이 존재의 놀라움은 다른 것이 아무리  급하고 큰 일이라해도 바로 지금 내가 향유하고 있다는 것에는 결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도 그냥 살아서는 안 된다는, 순간 순간의 존재가 가치있는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자존이자, 최선의 실존 방식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살아있네~ 이것은 영화의 대사가 아니다. 날마다 나는 열 번 이상은 크게 소리내어 이 벅찬 실존의 환희를 느낄 것이다. 꽃은 자신이 태어난 대지를 탓하지 않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