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2013년 4월3일 Facebook 첫 번째 이야기

체 게바라 2013. 4. 3. 14:18
  • 4월 봄볕에 몰려오는 권태

    "폭 좁은 철도를 끼고 있는 어느 초라한 기차역에서 우리는 앉아있다. 다음 기차는 빨라야 네 시간이나 지나서야 온다. 기차역 일대는 삭막하기만 하다. 우리는 배낭 속에 책 한 권을 가지고 있다. 그래, 꺼내볼 것인가 ? 아니다. 그러면 어떤 물음이나 문제에 관해 골똘히 사색에 잠겨 볼 것인가?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기차 운행 시간표를 훑어보거나 또는 이 역과 (.......) 우리는 더 이상 잘 모르는(.....) 다른 낯선 곳과의 거리가 다양하게 표시되어 있는 안내도를 자세히 살펴본다. 그러다 우리는 시계를 들여다본다. 겨우 15분이
    지났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국도 쪽으로 건너가 본다. 우리는 그저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녀본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이제는 국도변의 나무들을 세어본다. 다시 시계를 들여다본다. 처음 시계를 보았을 때보다 5분이 더 지났다. 이리저리 건너가는 것도 싫증이나 우리는 돌 위에 앉아 갖가지 형상들을 모래 위에 그려본다. 그러다가 우리는 문득, 우리가 또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반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 죽이기는 계속된다.“

    일생을 오직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만 사유하고 천착하는 데 보낸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의 저서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에 나오는 글이다. 이 책에서 하이데거는 삶의 무의미성과 그것의 극복을 권태(倦怠)의 문제와 연관하여 다루고 있다. 까뮈도 권태는 그 자체 속에 무엇인가 진저리나게 하는 것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를 흐물거리게 하는 권태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권태란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끊임없이 염려하는 현존재(Dasein)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기분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것의 구조는 붙잡고 있음이자 동시에 공허 속에 놓아둠이라 했다. 그러면서 위의 글처럼 우리가 어느 초라한 기차역에서 빨라야 네 시간 후에나 오는 기차를 기다릴 때를 예로 들었다. 이 때, 우리는 기차 시간에 의해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느끼는 권태의 존재론적 구조이며 이럴 때 우리는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시간 죽이기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모습이 아니던가? 우리 인간은 누구하나 예외 없이 언제 올지 모르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죽음에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 있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래서 하염없는 권태 속에서 시간 죽이기를 하는 참으로 권태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권태를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기분이라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비로소 분명해지는 것이 하나 있다. 자기 자신으로 살 것인가, ‘세상사람’으로 살 것인가? 본래적 삶을 살 것인가, 비본래적 삶을 살 것인가? 실존적 삶을 살 것인가, 전락할 것인가? 이 두가지
    길이 갈라서는 갈림길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현존재로서 인간은 언제나 그리고 매순간 이 갈림길, 바로 거기에 서있지만, 세상사람으로서 우리는 그것마저도 망각한 채 매일매일 시간 죽이기에 몰입하여 분주하게만 살아간다. 자, 이제 결정하자. 전락할 것인가, 실존할 것인가?

    요즘트위터페이스북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