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위기
"한 아이가 굶주려 죽는다. 물론 이것은 추문이다. 문학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 문학은 인간을 다른 것과 구별짓는 드문 행위들 가운데 하나다. 인간이 다양한 고등 포유류와 구별되는 것은 문학을 통해서다. 인간에게 어떤 특별한 얼굴이 그려지는 것도 문학을 통해서다. 그러면 구토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책(과 다른 위대한 작품들도)은, 단순히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한 어린아이의 아사가 추문이 되는 공간을 규정한다. 이 책(구토)은 그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 세상 어딘가에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한 어린아이의 죽음이 도살장에서의 어떤 동물의 죽음보다 더 중요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1964년 12월 그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될(물론 수상을 거절하지만) 사르트르는 동년 4월 18일자 <르 몽드>지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구토>는 아무런 힘도 없다."
사르트르가 이 말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문학과, 인류의 다수가 직면하고 있던 비참한 삶 사이의 간극이었다. 매일매일 굶주려 죽어가는 어린아이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위대한 소설마저도-이 경우에는 사르트르 자신의 소설 <구토>-이런 현실 앞에서는 그저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문학이 있기 때문에 한 아이가 굶주려 죽어가는 것은 추문이 된다는 것. 그것이 문학의 힘이 아니겠는가?
오늘도 이런저런 부조리한 소식들이 인간이라는 것,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적어도 인간으로 태어나 의식주 때문에 죽어가거나 어려움을 겪는 일은, 너무 억울해 철탑위의 고공에서 추운 겨울을 나는 노동자들의 농성이, 소수를 위해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하는, 말로는 정의와 공정, 공평의 이름하에 불의로 공동체를 욕보이고 속뒤집히게 하는 부조리는 없어졌으면 좋겠다. 월요일부터는 날씨도 점차 풀린다고 전한다. 우리네 살림도 날씨처럼 풀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