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삭풍의 겨울 벌판에서

체 게바라 2012. 12. 19. 23:52

 

형님, 밖은 매섭게 추웠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목을 자라처럼 움츠리고 깃을 잔뜩 올려 귀를 가리고 양손을 호호불며 종종걸음으로 엄동설한을 지나칩니다. 우리는 정적에 가라앉았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이따금 한숨이 내뱉어질 때마다 허연 입김이 따라 나왔습니다. 죽음 힘을 다한 것, 젖먹던 힘까지 다하고 천지신명의 행운을 얻어야 겨우 이긴다는 사실을 지난 두번의 대선에서 학습했건만 투표율이 상승할 때마다 우리의 기대를 잔뜩 부풀리게 했던 오늘의 선거는 진보의 집권이 결코 녹녹치 않은 마치 얼어붙어 풀릴 것같지 않은 동토, 언발에 오줌 누기가 아니냐는 자괴감이 엄습할 따름입니다.

형님, 우리의 실패가 선거기계라는 박근혜의 힘이나 여전히 난공불락이라는 경상도의 힘일까요? 자중지란의 진보, 민주 정당 내부의 패착일까요? 국민들의 알 권리를 철저하게 가린 동맹이 부럽지 않는 힘으로 뭉친 박근혜-새누리당 지지 일변도의 수구적 조중동과 TV매체들의 활약 덕분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또 계급투표에서 졌습니다. 박근혜라는 선거 상품의 질이나 정책, 인물, 선거 전략과 전술, 슬로건에서 진 것이 아니라 보수들의 계급투표와 80% 민중들의 계급배반 투표를 계급투표로 돌려놓지 못한 계급의 프레임 전쟁에서 진 것입니다. 여느 선진국이라면 이명박근혜 집권여당의 정책실패 정도면 당을 파산하고 해체하는 것이 마땅할 정도로 부끄러운 그들의 지난 5년의 성적이건만 저소득층, 비정규직 노동자층, 농민층까지 자발적으로 극우의 품으로 달려가는 이 기막히고 처절한 현실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대통령제라는 선거 제도가 저같은 사람을 좌절시키고 실망시키기 위해 고안된 제도라는 깨달음에 도달한 지금 어쩔 수 없이 작동하는 지난 이명박의 5년이라는 시간과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되어버린 이명박과 동렬의 무지한 녀에게 저의 5년을 의탁한다는 사실은 세계에서 유례없이 쪽팔리는 국민으로 살아왔고 또다시 인내해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통렬하게 실감하게 한 나날들이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품위를 지키며 살고 싶어도 단순히 대통령이라는 者의 품위로 인해, 챙피하면 옷만을 바꾸어 입는 새누리당으로 인해, 조폭 언론들로 인해, 그리고 자본의 보이지 않는 공갈에 의해 제 삶의 원칙이었던 품위있게 살다가 죽자는 신념은 하룻밤의 꿈이 되어버린지 오래입니다. 그런 심정이니 오늘 밤의 바람은 더욱 매섭게 달려듭니다.

형님, 김수영 시인의 풀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중을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처럼 그들이 그들의 실존의 토양인 대지의 본질을 깨우치는 그날까지 우리는 죽을 힘을 다 할 도리밖에요. 내가 아니면 내 아이들에게, 또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살아갈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을 우리는 쉽사리 포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형님, 감기 조심하시고 안녕히 주무십시요. 그들이 생명의 봄까지 억류할 수는 없다는 희망을 안고 저는 여전히 이 삭풍의 겨울에 남아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