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아가야, 그만 눈을 뜨거라.

체 게바라 2012. 11. 30. 15:02

 

 

 

 


안철수의 짧았던 새로운 정치 모노드라마의 1막이 끝났다. 그가 내건 화두가 자못 신선했고, 공공의 선에 근거한 것이었기에 그를 지지했던 지지층이나 일반 대중들도 허탈하기는 매한가지여서 이런저런 뒷담화가 분주하다. 나는 본질적으로 정치란 진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제도로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혁명과 같은 선세이셔널한 정치 혁신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 혁신조차도 결국 제도와 문화로 제도권과 국민 대중에게 꾸준하게 내재화되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이유다. 더욱이 우리 인간들이란 얼마나 부조리하고 진부한 존재이던가? 결국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닿게 된다. 공공의 이익을 체현하는 선의를 지닌 자가 정치적 공무를 담당할 때만이 그래도 신뢰가 가는 법이다. 그래도 지도자의 바탕이나 태도만큼은 진정성의 시대였던 노무현 시대가 지나자 우리에게 도래한 세계는 속물과 동물들의 세계, 몰렴(沒廉) 또는 무치인 단순히 실례나 실례가 아닌 부끄러움이 실질적인 마비된 반문명의 시기였다. 진정성이라는 용어 자체도 부끄러운 수단과 방법을 거리지 않는 삶의 피상성과 천박성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몰염치와 과시적 파렴치가 판치는, 다시 말해 진정성 대신 무사유가 판친 이명박 시대의 교훈은 이처럼 우리에게 처절했다. 그것은 진정성에 대한 도덕적 불감증과 가학증이 뻔뻔함과 당당함으로 우리를 압도해버린 저주받은 시대였기 때문이다. 헝가리 작가 산도르 마라이는 ‘열정'에서 이렇게 충고한다.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그동안에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원칙이나 말을 내세워 변명하고, 이런 것들이 과연 중요할까? 결국 모든 것의 끝에 가면, 세상이 끈질기게 던지는 질문에 전 생애로 대답하는 법이네. 너는 누구냐? 너는 진정 무엇을 원했느냐? 너는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 너는 어디에서 신의를 지켰고, 아디에서 신의를 지키지 않았느냐? 너는 어디에서 용감했고, 어디에서 비겁했느냐? 세상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지.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누구나 대답을 한다네. 솔직하고 안 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결국 너의 전 생애로 대답해야 한다는 것일세.

그렇게 이명박과 박근혜의 새누리당과 주류층은 속물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속물들이 우리의 이기적 부의 축적에 대한 욕망의 촉수를 충동질하며 체제와 윤리적 도덕을 없수이 여겨도 괜찮은, 세속의 입장에서 보면 괴물들의 세상일 수밖에 없는 그악스럽고 혼탁한 세상을 만들었다. 바로 부조리하고 진부한 세상이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을 연장하려는 박근혜 역시 진부함의 상징이요, 척결의 대상이다. 따라서 문재인과 안철수 진영은 공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심하고 회의하고 주저하는 가열찬 윤리적 비판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다만 전제 조건은 비판의 주체 스스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 그 전제가 가다듬어 졌을 때 비로소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가능하다. 이제 안철수의 새로운 정치 모노드라마 2막이 궁금해졌고, 문재인이 펼칠 대선 드라마도 흥미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새 세상이란 지고하고 지난한 길이다. 그 길이 사람 하나로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다는 가설은 불가능하다. 문재인과 안철수는 인간적 신뢰감 속에 양 손을 잡고 다시 향도하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