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은 정체성이다
습관은 의지적 운동을 본능적 운동으로 변형한다. 그런데 가장 의지적인 운동에서 의지가 계획하고 오성이 표상하는 것은 운동의 외적 형태와 극단만이다. 반면 공간에서의 운동과 신체 운동 능력의 실행 사이에서 먼저 저항하는 중간 항들로 채워지는 중간 지대가 있고, 우리는 노력 속에서 오직 그런 저항에 대해서만 어렴풋한 의식을 가진다. (....) 그런데 반복되고 지속된 노력의 양을 조절하고 우리가 도달하려는 목적에 따라 적용점을 선택하는 것으로 배운다. 그리고 동시에 노력의 의식은 사라진다.
-라베송, ‘습관에 대하여’-
우리가 피아노라는 악기를 배울 때, 그 악기에 능숙해지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라베송이 말한 ‘운동의 외적 형태와 극단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어떤 강사에게 배운다고 하더라도 강사의 직접적인 연주는 내 학습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악보에 대한 지적인 이해와 의지의 노력으로 피아노의 건반을 쳐야만 한다. 이때 익숙하지 못한 내 손의 운동 매커니즘과 피아노 건반이 가진 운동 매커니즘의 불협화음과 이질감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래서 라베송은 ‘공간에서의 운동과 신체 운동 능력의 실행 사이에는 먼저 저항하는 중간 항들로 채워지는 중간지대가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게 건반을 능숙하게 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저항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고 노력을 포기해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계속 연습하다보면 피아노 건반의 운동과 내 손가락 운동이 기묘하게 조화되는 순간이 온다. 마침내 저항이 극복되는 것이다. 어느덧 나는 피아노와 하나가 된 것 같은 일체감을 느끼는 순간이며, 이때 연주하는 피아노곡은 나의 내면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각인된다. 이것이 습관이다. 라베송의 말대로 ‘습관은 의지적 운동을 본능적 운동으로 변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습관의 매커니즘은 악기 연주나 운동 뿐 만 아니라 문학작품, 철학적 사유, 심지어는 타인을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경우에도 습관의 논리는 그대로 관철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의 동일성을 규정하는 제일의 원리가 습관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미 습관이 된 것, 지금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 그리고 나중에 습관으로 획득하게 될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테리 이글턴은 그의 저서 ‘이론 이후’에서 습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방점을 찍는다. 우리의 선함, 악함도 습관의 문제다. 그리고 습관이란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행동의 문제다. 플루트를 부는 것처럼 연습(행동)할수록 점점 나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적절한 마음의 상태를 창조해내는 것은 우리의 행동이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용감해지거나 관대한 일을 행함으로써 용감해지거나 관대해 진다.
습관에 대해 깨달음을 얻으며 느끼는 것은, 한 인간의 현재의 행동을 보면 그가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으며, 미래에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 대강을 읽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다른 것은 몰라도 박근혜 여사가 '줄푸세'에서 갑자기 '경제민주화'라는 화두를 들고 방향 전환한 것은 이멍박씨가 '국민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대국민 사기 공약에 버금가는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에 내 性과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걸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