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묘비명

체 게바라 2012. 2. 24. 17:19

 

묘비명(墓碑銘,epitaph)

묘비에 새긴 글. 죽은 사람에 대한 경력이나 그 일생을 상징하는 말 따위를 새긴다. 겨우 절차적 민주화의 희미한 반석 위에서 하늘거리던 김대중 국민의 정부, 노무현 참여정부의 위태위태했던 지난 10년의 벅찬 시간, 짝퉁 민주주의 괴물 이명박 정권과 뻔뻔한 수구 세력, 노회한 조폭 언론과 승자독식 자본이 연합 획책한 쓰나미 같은 미친 역류에 휩쓸려 한낱 백일몽이 되어버린 시간들.

갈 길은 멀고 다리를 걸고넘어지는 적들은 지천인데 삶과 죽음, 영달과 지조 두 갈래 길에서 고뇌할 때마다,살아 있으되 죽어 있지 않았고, 죽어 있으되 여전히 살아 있는 저 망월동 5․18 영령들과 살아서도 죽어서도 함께 무덤 어깨를 겯고 있는 저 준엄한 ‘묘비명(墓碑銘)’을 되뇌며, 진보와 신독(愼獨...), 평화와 사랑을 밥처럼 공기처럼 여기는 이 땅의 모든 이들과 함께 등골에 각인하고싶다.

중종 9년(1514년) 별시를 통과한 이래 '청렴 근실함이 남쪽 선비 중에서 으뜸'으로 일컬어지던 박수량(朴守良)은 천재지변이나 변방의 급보라도 들리면 두 아들에게 항상 일렀다.

"내가 초야로부터 일어나 외람되이 정2품에 이르는 분수 넘친 광영을 입었으니 내가 죽거들랑 삼가 시호를 청하지 말고 비를 세우지 말라." 그러나 분묘를 표시하는 묘표마저 없을 수 없어서 글씨를 하나도 새기지 않는 백비(白碑)을 세웠다.

속리산 아래에서 '허수아비'를 자칭하고 살았던 대곡(大谷) 성운(成運) 또한 유언하였다. "묘표(墓表)도 세우지 말라." 김인후(金麟厚)도 일렀다. "을사년 이후 벼슬은 적지 말라."

퇴계 또한 세상을 뜨기 직전 묘비가 아니라 묘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적으라고 유언하였다. 굳이 푼다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비록 물러났지만 본의 아니게 높은 벼슬을 받았다가 만년이 되어서야 숨었다는 곤혹스러웠던 평생 회환이 읽힌다.

이렇듯 적은 묘석과 조정에서 받은 관직조차 적지 않는 장묘 의식은 시대의 변화와 발전의 방향에 섰던 선비들의 삶과 앎의 차원을 전해주는 것이지만 퇴계 역시 그 일익을 감당하였던 것이다.

확장하되 변하지 않고
선명하되 가늘지 않고
의연하되 둔하지 않고
강직하되 꺾이지 않고
엄정하되 차갑지 않은
러시아의 문호(文豪)'니콜라이 고골리'

묘비명 - "고골리는 죽었다. 그는 러시아인 이었다. 그 손실이 너무 잔인하고 갑작스러워,우리는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쇼'
묘비명 - "내 우물쭈물하다 이럴 줄 알았다"

시인 천상병
묘비명 - 귀천(歸天)

중광스님
묘비명 - "에이, 괜히 왔다"

헤밍웨이
묘비명 -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다"

스탕달
묘비명 - "살고, 쓰고, 사랑했다"

노스트라다무스
묘비명 - "후세 사람들이여, 나의 휴식을 방해하지 마시오"

영국 소설가 헨리 필딩
묘비명 - "영국은 그가 낳은 자식을, 그 가슴에 안지 못함을 슬퍼한다"

임마누엘 칸트
묘비명 - "생각하면 할수록, 날이가면 갈수록, 내 가슴을 놀라움과 존경심으로 가득 채워주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속 도덕률이다"

프랭크 시나트라
묘비명 - "최상의 것은 앞으로 올 것이다"

아펜젤러
묘비명 -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이소룡
묘비명 - 브루스 리. 절권도의 창시자

르네 데카르트
묘비명 - "고로 이 철학자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블레즈 파스칼
묘비명 - 근대 최고의 수학자, 물리학자, 종교철학자인 파스칼

정약전(정약용의 형)
묘비명 - "차마 내 아우에게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며, 나를 보러 오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키에르케고르
묘비명 - "잠시 때가 지나면, 그 때 나는 승리하고 있으리라"

라이너 마리아 릴케
묘비명 - "오오 장미여, 순수한 모순의 꽃"

칼 마르크스
묘비명 -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