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한국인의 분노는 어디서 오는가
사람은 끊임없이 비교하며 산다. 친구 딸은 우리 아이보다 공부를 더 잘하고, 옆집은 우리보다 더 좋은 차를 굴리며, 대학 동창은 나보다 더 고급 아파트에 산다.
이런 자잘한 차이는 조금 속이 상하지만 인정하고 살 만한 것들이다. 본인의 원천적인 경쟁력에 관한 것이어서 책임도 자기한테 귀결된다. 진짜 열을 받는 것은 사회가 당연하다는 듯이 차별을 가할 때다. 서울에서도 부자들이 산다는 압구정 아파트를 재건축하는데 그 단지 옆을 지나가는 올림픽대로 구간을 지하화해준다거나, 경부고속도로 입구에서 반포IC까지 덮개공원을 만들어주겠다거나…. 소음은 가진 자 없는 자 모두에게 성가신 것인데 왜 잘살고 힘 있는 사람들 동네만 특별한 시설을 해주는 거지?
지하철도 강남에 위치한 역들이 더 화려하다. 더군다나 9호선은 황금노선이라고 부른다. 그럼 1호선은 동(銅)노선, 4호선은 은(銀)노선, 강북과 강남을 다 오가는 2호선은 합금노선이라고 불러야 할까. 보행자 도로의 보도블록은 왜 강북이 더 삐걱거리며, 고장 난 시설물은 왜 강남이 더 빨리 수리되는지.
또 있다. 오리~수원 간 분당선 연장공사는 착공한 지 10년도 더 됐는데도 아직 감감무소식인데 그보다 훨씬 늦게 시작한 신분당선(분당~판교~강남)은 올해 안에 개통한다. 이런 것을 일일이 따지면 졸렬한 사람, 열등감의 소치라는 소릴 들을까봐 사람들은 대놓고 딴죽을 걸지는 않는 듯하다. 하지만 마음속 치부책에는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차곡차곡 기록해두고 있다.
한국 사회는 법과 룰을 꼬박꼬박 지키고 사는 사람이 손해를 볼 때가 많다. 누구 말처럼 남들은 2년간 썩는데 고위공직자 자제 가운데 군 면제자는 왜 그렇게 많으며, 공무원이나 감독기관 인사들은 현직에 있을 때 어떻게 했길래 퇴직 후에도 너끈하게 그 조직에 낙하산을 타고 갈 수 있을까. 법관, 장관, 국회의원, 검찰은 권력을 가졌으면 됐지 돈까지 벌겠다고 청문회 때 보니 위장전입과 불법 부동산 거래투성이였다.
이런 불공정과 모럴해저드가 누적되면서 한국 사회에는 분노의 에너지가 채워지고 있다. 버스나 전철을 타보면 중·고등학생들의 언어가 얼마나 험한지 놀라게 된다. 부모의 스트레스가 이전됐건 과중한 학업부담이건 위험한 수준이다.
택시 기사들의 언어에서도 폭력성이 느껴진다. 퇴근 후의 선술집은 불만과 성토가 난무한다. 사회 곳곳이 부싯돌만 두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모습이다. 이를 증명하듯 터무니없이 사소한 일로 사람을 죽이고 흉기를 든다. 사회에 대한 이런 불신과 분노는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를 만들어 소통 부재의 위험한 지경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누군가는 이런 사회적 자본의 편중 배치나 왜곡을 심판관처럼 공정하게 평가하고 시정해야 한다. 하지만 대통령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모두 제 사는 데 코가 빠져 아무도 공정하게 봐주지를 못한다. 잘사는 사람, 권력 가진 사람은 교묘하게 혜택을 받아 더욱 번성하고, 그 반대편 사람은 열심히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사회, 강자가 약자를 밀쳐 쓰러뜨리고 그들을 자기 성장의 디딤돌로 삼는 사회는 공정하지 못하다.
그런데 이 정부 들어 유난히 공정과 정의에 분노하는 일이 잦아졌다. 대통령이 인사만 하면 불법 탈법에 절은 사람이 많고, 전문성은 부족한데 대통령과 같은 영남 출신이거나 고려대 동창이거나, 같은 직장에서 근무한 사람이 많이 발탁되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델이 붐을 일으킨 것은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임을 실토하는 현상이다.
‘분노의 시대’라는 매일경제신문 연재 기사는 한국 사람의 분노가 어디에서 오며 어떻게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