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만과 불평, 분노가 불러올 수 있는 공포를 극복할 새로운 국민적 컨센서스가 시급하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반동적 퇴행은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되는지 문제의 핵심을 모르고 자유주의의 극단에 쫓겨서 맞게 된 결과인지 모른다. 역사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서 떼어놓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지금껏 우리가 알아낸 결과는 자유주의적 삶이 아닌 사회민주주의적 삶의 형태에 속한 것이 우리라는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는데 최선이라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사실 좋은 외투가 으레 그렇듯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보다 감추어 버리는 것이 더 많았다. 빛좋은 개살구란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종교적 측면에서 관용의 자세를 견지한다. 하지만 공공정책의 측면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공동선을 위한 공동 행동의 가치와 가능성을 믿는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개인이 혼자서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공공 서비스와 공공재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누진세에 찬성한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이 누진세나 공공 규제를 일종의 필요악으로 인식하는 데 빈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국가와 공공 부문이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할 때 더 좋은 사회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신봉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옳았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책을 시행하는 국가 어느 곳에서도 공공 의료 서비스를 폐지하고, 무상 혹은 정부 지원 교육 정책을 끝장내고, 교통 및 기타 사회 공공부문의 필수 분야에 대한 지출을 삭감하는 것에 찬성하는 유권자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경제성장율 하락으로 인한 소득의 하락이나 정체 등으로 노후 연금과 공적 의료비에 대한 부분적 납부액이나 수혜 비율을 조정하는 정책에 변화에 대한 손질에는 동의를 하고 있다.
21세기 초까지 위싱턴 컨센서스는 대세였다. 어디를 가든 규제 완화와 작은 국가, 감세의 미덕을 설파하고 다니는 경제학자들과 전문가들이 차고도 넘쳤다. 공공 영역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민간이 하는 것이 더 경쟁력 있고, 효율적인 것처럼 보였다. 이런 위싱턴 독트린은 세계 곳곳에서 이데올로기의 치어리더들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니 2008년 리먼 부도 이후 상황은 반전되었다. 미국은 금융 부문과 경기 부양을 위해 거의 2조 달러를 쏟아 부어야 했고, 세계경제는 함께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번엔 유럽이 진앙지가 되었다. 그리스와 스페인, 이탈리아에 이어 프랑스마저 휘청거리고 있다. 양적완화 정책이라는 명목으로 화폐를 찍어 무한정으로 시장에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는 오히려 심리적 마이너스 상승률을 보이고 더블 딥의 공포가 전 세계를 덮고 있다. 처음에는 밀턴 프리드먼과 그 시카고학파 동료들을 찬양하는 신자유주의를 외쳤던 수많은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모두 석고대죄 하는 심정으로 존 메이너드 케인즈 앞에 엎드려 충성을 맹세하기에 이르렀으나 2011년 다시 닥친 전 세계적 경제 위기는 케인즈주의 경제학으로의 복귀만으로는 해답이 불투명한 상태로 보인다.
빈부 격차의 심화와 점증하는 기회의 불균형, 계급과 계층 간에 나타나는 불평등,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제적 수탈과 착취, 민주주의를 옥죄는 특권과 부패, 금권 정치 등 우리가 분노할 일들은 넘치도록 많다. 하지만 이제 체제의 결함만을 고발하고 다시 물러서는 것으로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대중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동원되었던 무책임하고 수사학적인 언동은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정치와 경제의 불안정을 넘어 인신을 옭죄어 안전마저 담보하지 못하는 불안의 시대에 들어섰다. 불안은 공포를 낳는다. 그리고 변화에 대한 공포, 쇠락에 대한 공포, 익숙하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는 시민 사회의 토대가 되는 신뢰와 상호 의존 관계를 파괴한다. 바로 이 불안에 따른 공포는 열린사회를 다시 한 번 더 문을 닫아걸고, 닫힌 사회로 가는 반동을 불러 올 것이다. 닫힌 사회는 사회 안정을 위해 우리의 자유를 희생시키려 들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불만, 분노, 불안을 사회적으로 진정시키지 못한다면 뒤따를 공포는 생각할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의 선택은 단순히 시장이냐 국가냐 하는 선택이 아니라,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콘센서스가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정부의 역할이다. 바로 복지의 확대를 위한 국가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에 대한 정부다. 역대 최악인 이명박 정권이 저지른 국정문란과 국토 파괴의 뒷수습과 보편적 복지를 어떤 형태로 시작할 것인가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끌어내고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담보하는 컨센서스 말이다. 우리에겐 그렇게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