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류인생
<하류 인생>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들을 보면 그들의 자연과 삶에 대한 진정성에 고개가 숙여져, 글을 업으로 사는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농부가 뙤약볕 아래에서 땀 흘리는 것으로 세상에 기여한다면 예술가는 예술로 기여하고, 농부가 그로써 자기 삶을 채운다면 예술가는 예술로 자기를 채우고, 농부가 수매價 앞에서 고개 떨굴 때에 예술가는 습한 골방에서 홀로 휘청거린다고, 진실하지 못한 예술가, 충분히 고뇌하지 않는 예술가나 농부의 땀 앞에 부끄러운 법이라고, 좋게 본다 해도 그런 부끄러움이란 겸손한 척하는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침 튀기던, 내가 간간이 글깨나 좀 쓴다는 것을 눈치 채고 추천이라는 형식으로 문단에 등단할 것을 재촉하던 꽤 잘나가던 글쟁이 시골 친구가 있었다. 지금도 여전하냐면 그런것 같지는 않다. 그 역시 그저 늙어가는 중늙은이에 불과하다.
그때, 나는 그의 그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아니 동의는커녕 심히 기분이 틀어졌었다. 그가 농부의 삶을 가볍게 본다거나, 오만한 예술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바 그는 오히려 인간의 어떠한 일이든 그 가치에는 우열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세상 모든 일들에는 자기 진실만큼의 개별적인 고유한 가치가 있다, 그러니 예술가가 농부를 얕잡아 볼 수 없듯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건 이런 뜻이었을 것이다. 예술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결여된 싸구려 반성에 대한 경계라고 이해한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아니, 심정적으로 동의되지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면서 대강 고개는 끄덕여 줄 수 있지만 가슴으로 흔연히 공감되지는 않던 게 나의 솔직한 기분이었다.
그때까지의 내 정서가 밑바닥 삶에 많이 밀착돼 있었기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그랬다, 거의 천성이라 할 완강한 기질에다 살아오면서 겪은 (그 파란만장의) 신산한 세월이 보태어져서일 텐데, 나는 늘 고상하고 품위 있는 이들보다는 저잣거리의 허술한 인생들에 더 큰 애정을 주는 편이었다. 몸으로 삶을 견디는 사람들, 가슴이 황량한 사람들, 수시로 무너지는 사람들, 굽이굽이 징그러운 사연들 많고 스스로 상처 내는 거친 위악으로나 겨우 한을 삭이는 저 안팎으로 보잘것없는 '하류 인생'들. 어릴 때부터 나의 관심과 애정은 늘 그쪽 삶에 기울어 있었다.
그랬기에 농부의 땀에 비교되는 예술가의 고고한 자존심이 나에겐 왠지 껄끄러웠다. 부끄러워하진 않아도 좋을지 모르지만 남의 부끄러워하는 마음에 질타까지 할 건 또 뭐 있나, 농부든 구두닦이든 어시장 꽁치 장수든, 생을 몸으로 살아내는 이들의 저 생생한 노역 앞에서 누가 감히 그 일의 가치를 따지고 삶의 진정성에 높고 낮음을 말할 수 있으며, 저 허기진 피로와 구체적인 애환 앞에서 예술이 과연 무엇이기에 그처럼 꼿꼿이 그보다 높거나 가치있는 작업이라며 '자기 몫의 진실'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그 친구의 말뜻이, 양반은 양반의 몫이 있고 상놈은 상놈의 몫이 있다는 식의 이기적인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인텔리와 프롤레타리아의 비교는 더욱 아니고, 비교라 한들 어느 한쪽을 옹호하거나 폄하하는 비교는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저 예술가 나름의 몫을 강조하기 위한 단순한 의도로 '들판에서 흘리는 농부의 땀'이 대비된 것뿐임을 알면서도, 잘 알면서도, 나에겐 그런 대비 자체가 왠지 심정적으로 떨떠름했으며. 물론 감정적 반발이 더 컸었다. 내 안에 있는 내 특유의 '하류 인생적인' 정서 - 저잣거리 인생에 더 밀착돼 있어 그것이 더 편하고, 그것이 더 친숙하던 나의 정서가, 한 예술가의 '나 예술한다!' 하는 고고한 자부심을 눈앞에 대하자 불쑥 '예술 그까짓 것이 뭔데!" 하면서 불편해했던 것이다.
안 그런가? 소설가니 화가니 음악가니 하는 소위 예술가들은 현실에서 비교적 대우받는 자리에 있다. 실제의 대접은 그렇지 못할지라도 아무튼 예술가라면 보통 사람보다 고상하고, 멋있고,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인정받는 게 사실이다. 사회적 자리가 그럴진대, 들판에서 땀 흘리며 구체적인 생산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에게 가끔 겸손해 봐도 좋은 것이지,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들을 보면 부끄러워진다. 는 식의 말을 하는 글쟁이들을 보면 한심해' 하면서 위풍당당한 자긍심마저 꼭 완벽히 챙겨 가야만 하나 하는 것이 예전의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요즘엔 조금 달라졌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누가 농부의 땀 앞에서 부끄러워하든 안 하든 그것엔 관심이 없다. 앞에서 말한 농부 운운의 이야기는 어느 쪽이 더 옳다 그르다는 말을 하려던 게 아니고 예전의 내 정서가 어땠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고고한 기품, 눈부신 성찰, 심오한 내면 추구, 그런 것들보다는 땀내 나는 저잣거리의 군상들, 그 비린내 나는 신파에 내 마음은 더 쏠리곤 했다는 것, 그쪽이 더 아름답고, 더 인간다워 보이고, 그쪽이 더 내 영혼을 자극했었다는 사실이다.
그럼 지금은 어떠한가?‘하류 인생’- 그쪽이 더 편하고 친숙하다는 개인적인 호감 역시 변함이 없다. '아름다움은 상처에서 피어나는 꽃'이라고 하는 소설가 송기원이나‘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는 상처가 있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영혼이라고 우기는 랭보의 시 구절을 들먹이지 않아도 그런 류의 상처 인식은 내 안에서 지금도 여전하다. 자랑일 것 없는 얘기지만 감히 말한다면, 나는 그런 류의 정한, 눈물, 거친 분노에 대해 알 만치 알고, 겪을 만큼 겪었고, 그리하여 내가 본능적으로 살갑게 보듬는 것은 역시 그런 '하류 인생'들인 것이다. 긴 말 필요 없다. 더도 덜도 없이 내 삶 자체가 '하류 인생'이 아니던가? 말하자면 '하류 인생'에 대한 나의 편애는 일종의 자기애였다고 고백하여야겠다. 그러니 자기애가 어디 가겠는가? 그러므로 저 지지리 궁상, 허접한 저잣거리에 대한 나의 애정은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신 앞에서 감히 존재론적 개성을 내세우는 경우가 있다. 나는 고통을 안다. 이런 경우다. 절절한 그리움, 숨 막히는 외로움,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이여, 그대는 외롭다는 게 뭔지 모르지만 나는 안다. 이렇듯 신에게는 없고 인간에게만 있는 것들을 내세워 감히 신 앞에 존재성의 유일무이를 경쟁하기도 했다. 까뮈가 시지프스의 형벌을 비극이 아닌 초월의 시작으로 해석했을 때, 이것이 또한 인간만의 존재성으로 신을 꼬나보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존재 증명 아니던가. 한 마디로, 인간이 신과 겨루려 하거나, 꼭 신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무언가 자기 존재성을 넘어서려 할 때면 인간이 가장 먼저 틀어잡는 무기는 인간 존재성의 '결핍'과 '한계'였다. 자기 존재성의 약점으로부터 초월을 끄집어내려는 이런 시도는 오호라, 과연 얼마나 철학적인 태도였던가.
'아름다움은 상처에서 피어나는 꽃'이라는 송기원의 문학 테제가 이와 비슷한 바탕에 있다. 송기원 뿐인가, 적지 않은 글쟁이들이 이처럼 인간의 적나라한 오욕칠정으로부터 신성에 겨룰 만한 무엇을 끄집어내려 애를 써왔다.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한승원이 불심에 전념하는 비구니보다 저잣거리로 뛰어든 파계승에게서 오히려 부처를 내비치는 것이 곧 그것이다. 그럴싸하지 않은가? (본능적으로 하류 인생에 밀착된다던 내 정서와 그 시작은 다르지만) 저잣거리에서 인간 존재의 위엄을 찾고 싶어 하는 이런 시선은 과연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손색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농부의 땀과 예술의 고고함으로 돌아가 다시 말해 보자면, 요즘 나는 예술의 고고함 쪽으로 급격히 마음이 쏠리고 있다. 저잣거리, 그놈의 저잣거리, 그리고 미워할 수 없는 하류 인생들, 그러나 그게 어쨌단 말인가, 아 이제는 그게 지루해지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게 인생이다! 라고. 그러나 우리가 정말 초월을 바란다면, 아니다 이런 현학적 말은 그만 하자. 신성에 접근한다느니 철학적 수사도 제쳐놓자, 그렇게 해서 다만, 그래도 우리가 우리의 존재성을 뛰어 넘어 작렬하는 순간 속에 한번 있어 보고자 한다면, 저 지지리 궁상의 정한과 상처는 실로 얼마나 구태의연한 일이던가? 그건 가만히 있어도 감겨드는 우리네 삶 자체의 남루한 입성이지 않던가?
그랬다, 예술이 어느 날 내 안에서 시퍼렇게 피어올랐다. 한때는 경멸했던 탐미주의 그 비슷한, 오직 예술로써만 인간은 구태의연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밖의 갈망이 내 안에서 갑자기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나의 생은 이렇게 흘러간다. 지난 시절 친구가 문단에 나를 추천하는 것을 거절한 이유가 내 생의 업으로 문학을 마땅히 수용할 수 있을 만큼의 자신도, 신념도 없었고, 단지 서너 편의 글로 문인이라는 완장을 자랑스럽게 너스레 떤다는 것이, 마치 박해받는 민중을 구하겠다며 실천 없이 입으로만 설쳐대는 부띠끄 부르조아지에 다름 아니라고 선을 그었고, 더구나 내 글을 찾을 독자들을 당당히 마주할 수 있는 자신이(실력이라고 해야 맞겠다)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면 나는 문학을 완장차지 않고 나의 전 생을 걸고 글을 쓰는 치열한 탐미주의적 글쟁이가 되고 싶다. 아니 로망적 유미주의가 풍부한 글쟁이가 되고 싶다. 이승에서는 그렇게 태어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