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행복할 권리에 대하여
1997년 대선 때의 일이다. 민노당의 권영길 후보는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간단한 선거의 홍보 구호를 우리에게 선 보였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그의 이 홍보 카피는 곧 다가올 IMF구제금융의 시발점이었고, 이후 우리는 무너지는 나라 경제와 함께 일상사가 된 구조조정의 와중에 땀 흘려 일하던 일터에서 추방당하는 신세의 서곡이었다는 것을. 그 때부터 우리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잃어버린 국민이 되었다.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는 노력만 하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이든 경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다는 돈이 전부라는 것뿐만 아니라 나도 유명인사가 될 수 있다는 욕망을 부추켰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목표는 분명히 행복한 삶을 위해서다. 이 명제를 우리 삶에서 빼버린다면 우리는 단 하루도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심리학자들은 행복이란 만족에서 만족으로 나아가는 진전이 아니라 욕망에서 욕망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정의한다. 또한 인간은 고통을 지양하고 쾌락을 선호한다. 심리적으로 쾌락은 플러스이고 고통은 마이너스다. 쾌락과 고통을 합산하여 쾌락이 고통보다 클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고 경제학자들은 주장한다. 욕망의 근거는 소유에 있다. 즉, 행복이란 어떤 것을 갖고자하는 욕망과 그 욕망에 부응한 소유의 결과에 따라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욕망이란 한 가지를 얻자마자 곧 거기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 다음 것을(단계로) 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심리학자들은 적응의 습관화 혹은 쾌락의 쳇바퀴라고 부른다. 소유함으로써 또는 소유에 대한 욕망과 기대감으로 우리의 욕망은 즉시 증가하며, 이것은 더 큰 소유와 더 큰 욕망을 증대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속성에 대하여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소유하는 것에만 빠져있다고 개탄하지 않았던가? 경제학자 폴 샤무엘슨은 행복을 소유를 욕망으로 나누어 정의했다. 즉 욕망보다 소유가 같거나 크면 인간은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꾸어 말한다면 소유를 늘리거나 욕망을 줄이는 것이 행복의 척도라는 의미다.
행복은 크게 외적인 요소와 내적인 요소로 나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행복이란 육체적 편안함이나 방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즐거움을 느끼는 상태다. 그러므로 진정한 행복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근대 이전의 철학자들 대부분은 행복을 내적인 요소에서 찾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근대 이전에는 소유할 수 있는 상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가지고 싶다는 욕망보다는 언제나 소유물이 부족한 시대였다. 따라서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정치가들 역시 인간의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억제하고 통제할 수 없다면 사회적불안과 정치적 불안을 피할 수 없었기에 무소유, 절제, 내적인 자기 통제 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인류의 물적 발전은 바로 이 행복의 추구가 욕망을 통제(줄이는 것)하는 것에서 소유를 늘리는 방향으로 진전되어온 역사라고 할 것이다. 소유를 늘리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논리가 자본주의 이념과 함께 우리의 삶속에 깊숙이 침투한 것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 소유를 폭발적으로 늘린 우리는 왜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는가? 지금도 여기저기에 자신들의 삶이 너무 불행하다는 원성어린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케인즈도 한마디 거들고 있다. 케인즈는 그의 짧은 저서 '내 후세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경제 에세이를 통해 행복의 관리에 대한 통찰력 깊은 경구를 전하고 있다. '소유하고자 하는 개인의 욕망이 개인만의 경제적 성취, 소수집단의 부만을 대상으로 삼을 때, 그 욕망은 사악하며, 날카롭고 통제 불가능한 존재가 되지만, 그 대상이 소외계층 전체로 대상화 될 때, 그 욕망은 부드럽고 선량한 것이 되는 것이다'는 존경스러운 레토릭을 던진 것이다.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의 핵심인 복지라는 개념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소수에게 부가 집중된다면 그 사회는 사악하고 통제 불가능한 불행한 사회가 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생산된 부의 분배가 전 국민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사회를 강력하게 희망했던 것이다.
그렇다. 욕망과 소유에는 한계가 없다. 풍요와 성공만으로 행복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난 것이다. 행복의 수준이 처음에는 경제발전단계에 비례하여 상승했다가 곧 완만해졌다. 따라서 부의 총량이 늘어난다고 해도 개인이나 국가 수준의 행복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결론이다. 이것은 수치로 증명된다. 2010년 우리나라 GDP의 60%정도를 30대 그룹이 차지했다. OECD는 한국의 최우선 과제로 소득불평등 개선을 꼽았다. OECD는 지난 6월 20~21일 열린 '글로벌 녹색성장 서밋 2011'의 결과물인 보고서에서 우리나라 가계가 정부로부터 받는 국민연금이나 기초노령연금 같은 공적 이전소득은 가계소득의 약 4%로서 OECD 평균 22%의 5배 이상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고, 이 때문에 복지제도와 세제를 통한 불평등 개선효과도 OECD회원국 가운데 꼴찌로 나타났다. OECD는 한국의 조세와 사회보장 혜택은 회원국 중 가장 비효율적이라며 이러한 낮은 수준의 복지는 OECD 평균 29%보다 훨씬 낮은 8%의 조세부담율에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 뿐인가? 비정규직 노동자들 수는 계속 증가하여 올해 5월 기준 831만명에 육박하고,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209만명이나 된다. 작년 기업의 영업이익율은 전년보다 16% 증가하였지만 소득에서 노동자의 소득 비중을 나타내는 노동소득 분배율은 61.1%에서 59.2%로 약 2% 하락했다. 경제성장의 과실이 기업의 호주머니로만 들어간다는 증거다. 이명박 정권 들어 경제,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증거는 넘쳐나고 있다. 한마디로 국민들이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 구조요, 부자와 대기업은 행복이 넘친다고 비명을 지르는 희한한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사회 경제적 불평등 구조를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없는 사회, 경제, 정치적 체제 속에서 필연적으로 불행에 직면해 있는 존재들이다. 더욱이 국가가 나서서 국가라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는 정책을 외면하고, 극소수의 집단이나 개인에게 부가 편중되는 정책을 펴는 이명박 정권을 그냥 쳐다보고만 있어야 하는지 묻고 싶다. 이런 정권의 국가라면 나는 국가라는 것조차 믿고 싶지 않다. 따라서 나는 이 정권에 고한다. 국민은 마이클 폴리의 말처럼 행복해질, 행복할 권리가 있는 존재들이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