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가 추구한 이성에 기초한 도덕적 사회
칸트가 추구한 이성에 기초한 도덕적 사회
우리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는 어떤 권리들을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았으며, 그 가운데는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추구권이
있다는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신봉한다.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 독립선언서에 이런 표현을 할 당시, 동 프로센의 피니
히스베르크대학에서 논리 및 형이상학 강좌를 맡아 교수로 있던 칸트는 이런
권리를 ‘양도불가능한 것’이며 음식과 물처럼 인간의 기본적 욕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일련의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칸트는 1724년 피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1804년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16세에 피니히스베르크대학에 입학했고, 그 후 평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자신의 모교에서 강사로 시작하여 46세에 정교수가 되면서 그의 진지한
저술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는 결혼을 한 적도, 여행을 한 적도 없었다. 칸트에게
경험은 정신활동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의 연구는 정신활동의
결과이다. 그는 경험이 아니라 이성에 기초한 완전한 사회를 추구했다. 칸트는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보다 잘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인간이 얼마나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갈 수 있는지 보여주었기 때문에
존경받는다. 그는 “도덕적 행동의 증거는 오직 이성에 의해 추론될 수 있을
뿐이고 단지 경험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만약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행동과 모순됨이 없이 행동할 때, 그것은 어느
정부도 거부할 권리가 없는 ‘보편법’이라고 주장한다. 칸트는 우리가 뜻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보편법에 모순되는 행동이 무엇인지 기술한다.
-자신을 포기할 정도로 수많은 고통으로 가득찬 인간을 생각해보자. 아무리
생각해도 미래는 행복보다는 불행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안 그는 이기심에서
자살을 결정한다. 이런 행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칸트는
인간의 일반적인 목적이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자살은
보편법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살기 위해 돈을 빌어야 하지만 그 돈을 갚을 없다는 것을 아는 한 인간을
생각해 보자. 절망에 빠진 채 그는 어쨌든 돈을 빌린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 다음에는 아무도 더 이상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보편법이 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그저 혼자 살기를 바라는, 따라서 매우
어려운 지경에 빠진 사람들을 도와주지도 혹은 해를 끼치지도 않는 한 인간을
생각해 보자. 하지만 칸트는 심지어 그 사람마저도, 모순 없이는 모든 사람들이
항상 그렇게 행동하기를 바랄 수 없다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인생에는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분명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우리가 모순 없이 모두가 채택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선의지(호의)에 기초한 행동이라고 말한다. 선의지는 비록 그것이 좋은
결과를 초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 고유한 가치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 가치는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다. 선의지를 갖고 행동한다는 것은
개개인의 남자 또는 여자를 단순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서로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자유민이라고 말한다. 자유민은 자신의 욕망과 공포 대신에 자신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외부요인들이 따로
그런 욕망과 공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선의지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면 어쩌겠는가? 칸트는 악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정치의 세계가 너무 추잡해서 도덕철학은 정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에 의존할 수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이상을 가질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악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상이 없다면 우리가
모순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논란할 여지가 없는 독립선언서와 같은 그런
권리를 보편법으로 서술할 기초를 잃어버린다고 강조한다.
칸트는 결과의 도덕성보다는 의도(원인)의 도덕성을, 실제적 효과의 도덕성보다는
추상적 정의의 도덕성을 강조한다. 칸트는 선과 악을 원칙 면에서 구분하지만
정치는 구체적 상황에서 행한 구체적 행동의 성과 악을 관심 갖는데, 그 이유는
같은 행동이라도 어느 상황에서는 좋은 결과를, 그리고 다른 상황에서는 나쁜
결과를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주제는 순수한 완전성인 반면, 정치는
정당성에 관심을 둔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의 행동이 비슷한 결과들을 산출함
으로써 정당화될 수 있다면 그 뒤에 숨은 내면적 동기의 일부가 아무리 추잡하다
하더라도 그 의사결정 과정에는 어느 정도의 고결함이 깃들어 있다. 정치가가
된다는 것은 결과의 도덕성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가는 ‘생각
못한 일을 생각’해야 한다. 만약 어떤 정치가가 밀로세비치 치하의 세르비아
혹은 사담 후세인 치하의 이라크 같은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활동한다면 그 경우
그곳에서 정상적인 사람을 상대할 때의 예절을 지키는 것은 미친 짓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가들이 오직 결과의 도덕성만을 추구한다면 그들은 냉소주의와 사기
행위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적어도 칸트의 말대로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도덕적 의도가 전혀 없는
세계에서는 진실을 말하거나 자신들이 한 약속을 지키는 일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의 도덕성에는 고유한 위험들이 내재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의 도덕성에는 고유한 위험들이 내재한다는 사실이,
그것이 정치가의 주요한 부분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키케로는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하는 유일한 잣대’는 ‘도덕적 정당성‘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총론으로만 진실이다. 냉전시대에 비록 공산권에 비해
서구의 도덕적 우위가 월등했지만 소련의 침공이라는 현실에 직면한 서구는
핵무기 개발, 스파이 활동, 그리고 내키지 않는 체제들에 대한 지원과 같은
전술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키야벨리는 종교가 바쁘다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앞세우는 내세가 지상의 문제를 지나치게 간섭할 때, 종교가 극단
주의로 흐르게 되는 것이 문제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