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아나키즘의 운명

체 게바라 2010. 4. 4. 23:50

 

아나키즘은 순탄치 않은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 우선 아나키즘의 탄생은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이기도 했다. 사회주의 운동은 초창기부터 아니키즘과 맑스주의로 분열되었다. 아나키즘과 맑스주의는 예컨대 권위의 문제를 놓고 격렬하게 논쟁했다. 사회주의 운동은 이를테면 애초에 둘로 쪼개져 태어났다. 그런데 세상에는 수많은 분열들이 존재한다. 우리에게 좀더 친숙한 것으로는 예를 들어 보수와 진보의 분열이 있고, 우파와 좌파의 분열이 있다. 좌파 내부에도 예를 들면 NL과 PD라는 분열이 있었다. 온갖 분열을 보고 있노라면 공동체는 본래 분열이라는 운명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며, 또한 이러한 분열에 정념이 집중되는 동안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가령 남자와 여자의 연애 같은 문제는 사소한 문제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런데 참으로 기묘하게도 이 후자의 분열은, 즉 여자와 남자의 분열은 인류로 하여금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었다.

 

아나키즘의 탄생이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이기도 했다는 사실 말고도 아나키즘의 운명이 순탄치 않음을 보여주는 다른 사실이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아나키즘을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한때 사람들에게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와 같은 말이었다. 요즘에는 “무정부주의”라는 말이 갖는 부정적 함축 때문인지 아나키즘과 무정부주의를 등치시키는 경향은 사라졌다. 사실 아나키를 무질서와 등치시킴으로써 아나키즘을 비판하려는 유혹은 언제나 있어왔는데, 프루동은 오히려 “사회의 가장 완벽한 모습은 질서와 아나키의 결합에서 발견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1) 사실 아나키즘의 엠블럼인 이른바 Circle A에서 A를 둘러싼 원은 질서를 뜻하는 Order에서 온 것이다. 하지만 티셔츠에 새겨지곤 하는 변형된 형태의 아나키 심볼, 이른바 아나키 펑크 심볼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여전히 무질서를 부각시키고 있다.

 

요즘에는 분명 아나키즘을 곧바로 무정부주의와 등치시키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다시금 아나키즘을 반권위주의와 등치시킨다. “반권위주의”라는 말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실 일찍이 권위에 대한 논쟁을 하면서 엥겔스는 아나키스트에게 “반권위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은 적이 있다.2) 하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 말을 낙인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에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가 한국에서 강연을 한 후 권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정치는 권위에 대한 부정에 기반하고 있다, 즉 정치의 원리는 아나키적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이러한 답변에서 권위에 대한 부정과 아니키즘은 거의 자동적으로 등치되고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을 반드시 반권위주의와 등치시킬 수는 없다고 하는 좀더 균형잡힌 입장도 있다. 예를 들어 아나키즘적인 공동체 운동가인 하승우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아나키즘을 삶의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아나키즘을 단순히 “무정부주의”로 번역하지 않는다. 이들은 “반강권주의反强權主義”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말한다. 아나키즘은 국가만이 아니라 시장의 폭력에 맞서고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와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주의에도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미래는 완전한 무질서가 아니라 내가 합의한 질서를 뜻한다. 내가 스스로 복종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질서는 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나키스트는 모든 권위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을 거부한다. 아나키스트는 스스로 동의한 권위라면 전체의 결정이라도 자신이 결정한 것처럼 따르려 한다.3)

 

이러한 말은 하승우가 왜 아나키스트이면서 동시에 공동체 운동가인지를 보여준다. 그는 아나키스트가 “스스로 동의한 권위라면 전체의 결정이라도 자신이 결정한 것처럼 따르려 한다”라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며, “삶의 신념”으로서의 아나키즘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여하간 그도, 다른 관점에 비해서 좀더 균형잡힌 관점을 지니고 있는 그도, 여하간 아나키즘을 번역해야 할 유혹을 떨칠 수는 없었고, 그래서 그것을 “반강권주의”라고 번역한다. 물론 “무정부주의”라는 문제가 많은 기존의 번역을 교정하려는 의도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여하간 스스로 새로운 번역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아나키즘을 곧바로 이해하려는 데는 어떤 장애가 놓여 있는 것도 같다. 아나키즘은 계속해서 재번역되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난 것도 같다. 이러한 운명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마도 “아키”보다는 “안”일 것이다. “안”은 무를, 없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아나키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무엇의 없음이라는 방식으로 말이 구성되어 있다. 아나키는 지배자의 없음을 뜻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배자가 없어질 때 공동체가 무질서에 빠진다고 생각하고 이를 우려한다. 이런 관점과 우려를 받아들이면 아나키즘에 대한 번역어로 반권위주의가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권위의 몰락이 가져온 좋지 않은 결과들을 점점 더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렇다면 아나키즘에 대한 번역어로는 “반강권주의”가 더 좋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서 아나키즘이 이렇게도 번역되고 저렇게도 번역되는 가운데, “지배자의 없음”이라는 공백과 불안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근본적인 철학적 성찰의 과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제 아나키즘에 대한 세 개의 번역어를 비교해보자. 무정부주의, 반권위주의, 반강권주의. 첫 번째 번역어는 중립적인 용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무”와 “정부”는 그 자체로 중립적이다.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번역어에서 “무”는 “반”으로 어느새 변경되어 있다. “반”이라는 것은 무엇에 대한 반대를 뜻하므로, “반” 뒤에는 중립적인 항이 올 수가 없고, 가치를 탑재한 무언가가 와야 한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뉘앙스의 “권위”가 오고, “권위”를 순전히 부정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자, 부정적인 뉘앙스가 한층 더 강화된 “강권”이라는 표현이 그것을 대체한다. 그리고 이렇게 되자 아나키즘은 수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국가에 대한 반대이며, 또한 시장의 폭력에 대한 반대이고, 또한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에 대한 반대이고, 또한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주의에 대한 반대이다. 더 나아가 하승우는 우리가 “아나키즘의 다채로운 면들”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4) 하지만 아나키의 원래 뜻인 “지배자 없음”은 단순히 지배자 없음을 뜻한다. “무정부”도 단순히 정부가 없음을 뜻한다. 이렇게 보면 저 세 가지 번역어 가운데 새삼 아나키즘의 원래 뜻에 가장 가까운 것은 “무정부주의”였다.

 

“반강권주의”라는 용어가 갖는 특징은 누구나 그 용어를―용어의 뜻을 이해하고 있는 한―아무런 생각 없이도 지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권위주의의 해악을 누구나 느끼고 있었던 시절에는 “반권위주의”라는 표현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아무런 생각 없이도 지지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권위의 부재가 가져오는 실존적인 불행들이 느껴지자, 아나키즘을 새롭게 번역할 필요성이 생겼다. 하지만 다시금 아무런 생각 없이도 지지할 수 있는 용어로 말이다. 이렇게 보자면 아나키즘은 그 불변적인 의미 성분으로 “아무런 생각 없이도 지지할 수 있는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어야 하는 것도 같다. “반강권주의”라는 번역은 아나키즘에 왕관을 씌운다.

 

하지만 “아나키즘”이라는 용어 자체는 어떤가? 지배자가 없음을 우리는―“지배자의 없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고 있으면서―아무런 생각 없이도 지지할 수 있을까? 우리는 노예가 아니라 주체이지만, 선뜻 그것을 지지할 수가 없으며, 자꾸만 생각을 하게 된다. 반강권주의는 생각 없이도 지지할 수 있다. 아나키즘은 선뜻 지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꾸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다면 아나키즘은 사유 촉발 성분을 포함하고 있는 것 같다. 지배자의 없음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 불안한 것에 직면케 하며, 과연 지배자가 없는 상태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프루동은 신중하고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의 가장 완벽한 모습은 질서와 아나키의 결합에서 발견된다”라는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프루동은 아나키가 문제의 반쪽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질서와 아나키의 결합”을 말한다. 그는 양 팔로 두 가지를 붙잡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죽은 왕의 왕관을 집어들 손이 없었다. 그는 아나키에 왕관을 씌우지 않는다. 그는 “모두가 왕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곳에서 “아무도 왕이 아니다”라고 말한다.5) 하지만 일의적 존재 개념을 통해 존재의 평등을 가장 열정적으로 설파하는 들뢰즈는 “일의적 존재는 유목적 분배이자 왕관을 쓴 아나키다”라고 말한다.6) 들뢰즈는 죽은 왕의 왕관을 챙겨 놓는다. 프루동은 질서를 취하고 죽은 왕의 왕관은 버린다.

 

“반권위주의”라는 말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보자. 이 말은 생각보다 명료한 표현이 아니다. 우선 이 말의 의미에는 어떤 애매성이 있다. 읽기에 따라서 말이다. 우리는 이 말을 “반-권위주의”라고 읽을 수도 있고 “반권위-주의”라고 읽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말을 권위주의에 대한 반대로 읽을 수도 있고 권위에 반대하는 주의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을 사용할 때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 의미로만 사용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우리의 상징적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혹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애매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잠깐 지젝의 사유를 끌어들여보자. “You can fool all the people some of the time, and some of the people all the time, but you cannot fool all the people all of the time.” “모든 사람들을 얼마 동안 속일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을 언제나 속일 수 있지만, 모든 사람들을 언제나 속일 수는 없다.” 링컨의 이 유명한 말을 놓고 지젝은 자신의 이성을 이렇게 사용한다.

 

 

그것은 언제나 속일 수 있는 그 어떤some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모든 경우에 누군가는someone or other 반드시 속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만 ‘링컨이 정말로 의미했던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잘못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이 수수께끼에 대한 가장 개연성 있는 답은 그가 이 애매성을 의식하지 않았다―그는 단지 재치 있는 말을 하길 원했던 것이며, 그 구절은 ‘그럴듯하게 들렸던’ 까닭에 ‘그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 아닌가?7)

 

지젝은 링컨의 저 긴 말을 “텅 빈 기표”, “주인기표”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기표가 기의 내용의 층위에서 존속하는 근본적 애매성과 비결정성을 ‘봉합’한다고 말한다.8) 그런데 “반권위주의”라는 표현도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어떤 사람이 이 표현을 사용할 때 그는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의미 가운데 정확히 어떤 의미로 사용한 것일까? 가령 반권위주의자란 권위에 대한 반대를 자신의 “주의”로 삼는 사람일까 아니면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사람일까? 우리는 지젝처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누군가가 “반권위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는 이 애매성은 단지 의식하고 있지 않은 것이며, 이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던 까닭에 입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이때 그는 상징계의 어떤 틈새를 덮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