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봄날은 간다

체 게바라 2010. 4. 5. 17:41

 

우연치고는 참 절묘했다. 법정 스님 입적 소식을 접하던 그때, 한 청년(김예슬)이 대학 문을 박차고 나오는 선언문을 읽게 되었다. 법정 스님의 입적과 이 청년의 탈주, 둘 사이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적어도 표면적으론 그렇다. 하나, 그 두 가지 사건을 동시에 접하는 순간, 둘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맞물려 내 마음 속에 깊고 큰 파동을 연출해냈다. “스무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그의 선언문 가운데 가장 내 가슴을 ‘친!’ 대목이다.

법정스님 입적과 김예슬의 탈주

 

 

‘꿈을 찾는 게 꿈’이라니. 우리 시대 청춘의 허상을 이보다 더 잘 말해주는 것이 또 있을까? 꿈을 가져라! 꿈은 이루어진다! 도처에서 ‘꿈의 서사’들이 난무하고 있다. 마치 꿈이 없으면 이 화려한 글로벌 시대를 살아갈 자격조차 없다는 듯이. 한데, 참, 이상하다. 꿈이란 본디 다 다른 법 아닌가. 한데, 왜 이 꿈의 서사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거지? 초인적인 노력과 가차없는 추월, 그리고 목표지점에 골인! 그래, 여기까진 좋다. 그 다음엔? 그 성공이 가져다 주는 돈과 인기. 그 다음엔? 없다! 아니, 있긴 하다. 더 높은 목표지점을 향한 또 다른 질주.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가 끊임없이 복제해내는 ‘꿈의 서사’다.

하지만 이거야말로 꿈에 대한 ‘형용모순’이다. 꿈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상식에서 미끄러지고 통념을 와해시킬 때, 꿈은 그 순간 탄생한다. 따라서 동일하게 복제된다면, 그건 이미 꿈이 아니다! 게다가 더 어이없는 건 우리 시대 꿈들은 다 명사로 표현된다는 사실이다. 꿈이 뭐냐고 물으면 다들 이렇게 답한다. 연예인, 변호사, 의사, 교사, 아니면 공무원, 심지어 공기업 직원…. 이상하지 않은가? 꿈은 ‘꾸는’ 것이다. 고로, 명사가 아니라 동사고, 주어가 아닌 서술어다. 증여의 달인이 되고 싶다, 세상 모든 이와 친구가 되고 싶다, 영적 자유를 누리고 싶다… 이런 것들은 왜 꿈이 될 수 없는가? 서술어는 흐름이고 운동이다. 흐름과 운동은 소유할 수가 없다. 소유하기 위해선 그것들을 명사로 묶어놓아야 한다. 하지만 명사가 되는 순간 그 낱말이 가지고 있던 흐름과 운동은 멈추고 만다. 모든 소유가 ‘반생명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꿈을 한낱 직업명사로 말하는 순간, 그 활동 안에 잠재한 ‘리듬과 파동’은 지워져 버린다. 남는 것은 오직 화폐뿐! 이런 것이 꿈이라면 한바탕 헛된 꿈이거나 아니면 차라리 ‘악몽’이다.

그러므로 이젠 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 명사로 얼어붙은 꿈의 표상들을 해체해야 한다. 청년 김예슬은 말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한 번 다 꽃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기 전에…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자유의 대가로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삶의 목적인 삶 그 자체를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멋진 꿈 ‘소유로부터의 자유’

그렇다. 소유가 아닌 그 소유로부터의 자유, 명사가 아닌 동사로의 탈주, 이보다 더 멋진 꿈이 어디 있으랴. 바로 여기였다! 내가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이 청년의 외침을 하나의 파동으로 인지했던 지점이.

봄은 바람과 함께 온다. 올 봄엔 유난히 바람이 드세다. 하나 이 거센 바람 속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어날 것이다. 청춘 또한 인생의 봄이다. 이제 더 많은 청년들이 ‘허튼’ 꿈에서 깨어나 저 바람 부는 광야를 거침없이 질주하기를 희망한다.

문득, 법정 스님이 언젠가 하셨던 법문의 한 구절이 귓가에 맴돈다. ‘봄날은 갑니다. 이 무상한 계절의 변화 속에서 저마다의 꽃을 피우시기를!’

         - 고미숙 고전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