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부조리와 무의식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 존재에 대한 보고서 <구토>

체 게바라 2009. 10. 20. 17:26

 

부조리와 무의식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 -

대중적 순응주의와 여분의 존재(존재의 무)에 대한 보고서

 

구토(嘔吐) - 장 폴 사르트르

 

 1938년 사르트르를 노벨 문학상으로 이끌고, 이 수상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한 그의 첫 소설 <구토>는 근대시민사회의 소시민적 삶에 대해 ‘겉 치레로 살지 마라’, ‘비본질적으로 살지 마라’, ‘마땅히 네가 되려고 하는 것으로 살라’는 주제를 주인공의 일기 형식을 빌어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깨우고 있다.

 

앙투앙 로캉탱은 어느 날 물수제비를 뜨려고 집어 든 자갈에서 갑자기 혐오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후에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이 일기 형식으로 전개된다. 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첫 주 월요일에는 늘 보아오던 ‘독서광’조차 곧바로 알아보지 못하는가 하면, 그가 악수를 하려고 내민 손이 희고 가느다란 벌레로 보이는 혐오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 또 화요일에는 길거리에 나뒹구는 종잇조각조차도 줍지 못한다. 종이가 살아있는 벌레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후 식사를 하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심지어 여자 친구와 정사를 벌이다가도 욕지기를 느끼거나 구토를 한다. 이 같은 낯섦, 이해할 수 없음 앞에서 로캉탱은 자꾸 구토를 해댄다. 자신에게 생긴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넷째 주 수요일이 되어서야 그는 ‘독서광’과 점심을 함께하며 토론을 하다가 드디어 자신을 괴롭히는 구토의 정체를 깨닫게 된다. “심한 욕지기가 나를 휘어 감는다. 여기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왜 나는 휴머니즘에 관한 토론에 휩쓸려 들었을까? 왜 사람들은 여기에 있는가? 왜 그들은 먹었나? 그들은 사실상 자기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나는 떠나가고 싶다. 어디론지 정말 나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 그 속으로 나를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런 곳으로 가고 싶다. 그러나 내 자리는 아무데도 없다. 나는 여분의 존재이다.”

 

로캉탱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혐오감의 정체는 바로 왜 여기에 있는지, 왜 먹는지, 왜 사는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사실상 자신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단지 일상의 삶에 빠져 하루하루를 그저 남들이 사는 대로 따라서 살고, 남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 말하면서 무의미하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없어도 그만인 남아도는 존재, 곧 여분의 존재라는 것이다. 로캉탱은 이러한 그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한다. “삶이란 무엇이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진심으로 나는 삶이란 아무 것도 아니며, 그저 텅 빈 껍데기일 뿐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 우리는 자기 자신을 거추장스럽게 달고 다니는 거북한 존재다. 어느 누구도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모든 존재가 저마다 혼란한 마음과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스스로를 ‘여분의 존재’라고 느낀다.”

 

즉, 로캉탱은 무의미하고 혐오스러운 일상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욕지기를 느끼고 구토를 해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 욕지기와 구토는 그가 실존의식에 눈을 뜨는 것이며, 한마디로 자신의 삶의 의미와 존재의 이유를 찾고 싶다는 것에 도달한다. 사르트르는 주인공 로캉탱을 통해 남들을 따라서 말하고, 남들을 따라서 살며, 그 안에서 평안을 느끼는 현대인들이 즐기는 대중적 삶의 본질을 순응주의(le conformisme)라고 불렀다. <구토>에 등장하는 카페의 손님들, 산보하는 군중들이 바로 그 대표적인 부류다. 그들은 평소에는 카페에 모여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에 담소를 나누거나 토론을 벌인다. 서로 똑같은 생각을 하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지만, 그럼으로써 그들은 모든 것을 아는 대중의 일원이 되지만, 사실은 스스로 아는 것이 없는 개인이 되는 것이다. 놀라운 자기소외다. 그들은 예를들어 바닷물에 대해 한 번도 스스로 알아보려 애쓰지 않고 바다는 초록색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는 대로 믿는 것이 대중의 일원으로서 안정감을 갖고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캉탱은 이러한 대중들의 무의미한 삶이 지도자 내지 사회 지배층에 의해 교육되고 권장된다고도 생각한다. 존경받는 장학관이고 책을 세 권이나 남김으로써 도서관 광장에 거대한 동상으로 세워진 앙페트라즈, 그리고 법관, 의사, 군인, 성직자 부류에 속하는 지배층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은 카페에서, 성당에서, 결혼식장에서, 장례식에서 사람들에게 세상에 찌든 자신들의 얼굴을 내보이면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되도록 표내지 말고 남들을 따라 평범하게 살라고 설교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 의식 없는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후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적인 철학 저서인 '존재와 무'에서 인간은 태초부터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고 선언한다. 스스로 선택하고 창조하며, 책임짐으로서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고 밝히고 있다. 세상의 모든 도구에는 그 본질이 있다. 톱은 썰기 위해 존재한다. 썰지 못하는 톱은 이미 톱이 아니다. 그러므로 도구는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에게 본질은 없다. 인간은 세상에 그저 던져져 있을 뿐이다. 또한 다른 사물과 달리 인간은 자신이 아무 이유 없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다. 이 극단적인 허무를 깨닫는 순간, 비로소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즉, 나 자신을 본질적으로 구속하는 것은 없다. 나 자신에 대해 원래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근원적으로 '자유'인 인간은 그가 처해있는 상황 속에서 온갖 어려움에 부딪히고 주위로부터 저항을 받으며 이러한 저항에 의해 비로소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출현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존재라는 명제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후 사르트르는 실존의 완성을 위해 ‘앙가주망‘을 실천한다. 의식 존재인 인간은 각자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과거를 초월하고 현재의 자기를 부정함으로서 실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 나간다고 한다. 인간의 존재양식은 현재의 상태로부터 자기해방을 도모함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목적을 향하여 나가기 위한 자기구속을 앙가주망이라고 정의하였다. 즉 앙가주망이란 정치적, 사회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구속하는 체제와 이념 등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참여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르트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이라는 집단적 폭력앞에 '참여'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롭다. 그러나 이 자유를 억누르는 세력과 집단이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자유를 억누르는 모든 세력에 대하여 저항하고 싸운다. 이러한 그를 가리켜 인간의 자유를 위하여 '행동하는 지성' 혹은 '실천하는 지식인'의 훈장을 달아주게 된 것이다. 알제리 반전운동, 베트남 평화재판, 1956년 소련이 체코를 침공하자 그는 공산주의와 결별을 선언하며, 미국의 베트남 참전에 대한 반전운동, 드골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68사태'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심지어 70년대 우리나라에서 김지하 시인이 박정희 독재정권의 부패와 독재를 비판한 시 '오적'으로 반공법에 의해 구속되자,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으며, 저 미 제국주의자들의 지원을 받는 철권 독재자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 민중혁명을 완성한 체 게바라에 대하여는 억압과 편견이 없는 공동체적 삶을 꿈꾼 체 게바라를 칭송하여 '20세기 가장 위대한 인간'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문학에서는 까뮈에, 철학에서는 하이데거에 뒤진다고 평가받는 사르트르가 프랑스 지성으로부터 오히려 까뮈보다도 더 추앙받는 것은 바로 이 행동하는 지성인의 표상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앙가주망은 본래 ’계약‘이나 ’구속‘을 뜻하는 프랑스어인데 사르트르는 이 말에 실존주의적 의미를 부여하여 사용했다. 즉, 인간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자유를 구속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며 동시에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의 자기구속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 구속은 역사적 현실이 요구하는 사회문제라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따라서 앙가주망을 ’사회참여‘의 동의어로 사용하는 것은 바로 사르트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