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연가
젊어서 나는 고향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인연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했거나 또는 멀리했다.
그랬기에 젊은 날의 내 기억 속에서 꿈틀거리는 고향은, 늘 누추했고, 신산(辛酸)스러웠으며,
마치 가까이 다가가면 그 남루한 정체가 드러날까 사람들이 내 출신을 묻는 것에 난감해 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하여 사람들이 내 출신이 제천이라 말하면 상대가 알아듣지 못해 장황하게
설명해야 겨우 알아듣는 것에 덧붙여 다시 제천 속의 한수를 그들에게 길게 설명할 일이 당혹스러워
대개는 충주라고 했으나 사람들은 자기 기억 속에 좋거나 대표적으로 남아있는 지명에 대한
연상을 작용시켜 대부분은 내 입에서 뱉어진 충주를 청주로 알아들었고, 그에 대해 나는 다시
뒤따라야 하는 구차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런 경험은 칠십년대 중, 후반에 고향을 떠난
대부분의 세대가 학교나 사회에서 겪었을 고향에 대한 아주 일반화된 현상이었음을 친구들을 통해
알았고, 그것에 대해 나나 지인들은 별다른 고향에 대한 의식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젊은 날, 우리는 우리의 고향에 대해 이중적 행태의 죄를 짓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랬다. 내 젊은 날의 고향은 그렇게 쓰레기통의 휴지처럼 나에게는 자신의 인연을 다 마쳐
흙속으로 매몰되거나, 곧 소각되어 없어질 대상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렇게 젊은 날의 내게
고향이란 아름다움과는 거리를 두고 멀어지거나 떨어져서 존재하는 대상이었으며, 그랬기에
고향에서의 내 헐벗은 유년이 물고 늘어지는 정한을 나는 결코 좋아할 수 없었다. 게다가
타관살이에 익숙해져가고 서서히 저잣거리의 배부르고 등 따신 현실에 닿으면서 고향은
내 기억에서 시간을 두고 차츰 멀어져 갔고, 물이 차올라 쫓겨나는 피난민처럼 아버님마저
고향을 떠나시자 고향을 가진 타관바치들의 보편적인 고향의 정서마저도 당시의 나에게는
온전하지 간수되지 않았고 더불어 건조하게 메말라갔으며, 따라서 젊은 날의 내게 고향이란
그저 내가 그곳에서 살아가던 동안만큼의 고향일 뿐이었다.
21살에 고향을 완전히 떠나 다시 고향을 찾은 것은 내 나이 10여년이 지난 31살이었다.
형제, 자매들과 충주에서 단양으로 가는 유람선을 타고 월악나루 쯤에 다다랐을 때였다.
형제들 모두가 이층 선상의 뱃전으로 몰려나가 물속에 파묻힌 우리 집을 서로 가늠하며
수런거렸다. 그랬다. 형제들의 수런거림 속에서 내 고향과 내 옛집은 바로 거기에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파득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햇빛이 하얗게 부서지는 물빛 속에서 내 고향은 그곳에
말없이 잠자는 듯 누워있었다. 나는 갑자기 고향의 추억이 주는 애잔함과 아름다움이 안타까워서
가슴이 아파왔다. 저렇게 우리 인간의 보편적 감성과는 한 점 인연도 없는 것처럼 물속에
보이지 않고 누워있는 고향이 불쌍하고 외로워보여서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시려왔다,
그러나 마치 홀로 죽은 것처럼 누워있는 고향은 우리들의 타관살이로 인해 각자 제각각의 개별적
삶의 형태를 띠고 단지 관광의 대상으로 존재했지만, 이내 악착같이 각자 자기의 세대를 통과했던
수없이 많은 사연으로 공유된 인연으로 온전히 일체감을 이루고 우리의 가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저곳에 내 기억과 내 추억이라는 시간의 잔해들이 함께 누워있으므로 나의 고향은 개별적이기에
보편적이었으며 끝끝내 현실의 누추함과 고단함을 당당히 이기고 있었다.
그런 것일까? 세상의 풍요로움에 젖으면 고향의 누추함이 멀어지고, 세상의 고단함을 말할 때는
고향의 풍요로움이 안타까워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단양나루에서 다시 돌아 충주에 닿는 길은
석양 무렵이었다. 석양이 저무는 호수의 물은 빛의 잔재들로 반짝거렸다. 그 빛의 잔재로부터
나는 내 몸에서 달아나는 타관살이의 고단함과 풍요로운 질감으로 채워지는 아늑한 고향을 흠뻑
받아들였다. 모든 빛은 석양에서 소멸을 시작하여 어둠의 적막으로 끝장난다. 이윽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둠속에 잠겨 있었다. 고향을 품은 호수는 보이지 않았고, 고향은 내 마음속에서
자신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채근했다. 그래서 가끔씩 차창을 밀고 들어오는 바람소리마저 외로웠고,
서러워진 눈가로는 눈물이 주책처럼 찔끔거려졌다. 이 예기치 못한 향수는 그동안 소멸되고 잊혀진
것 같았던 고향이 다시 살아나 이제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의 내 삶의 뿌리를 흔들며 들볽아 댈 것
같은 예감으로 번져왔다. 그리고 살며시 십여년 만에 다시 만난 고향에게 말을 붙였다.
미안하구나, 고향아,
여기 앉으렴.
나는 너무 오래 너에게서 떠나 다리 아프도록 대처를 서성거렸다.
이제 내 마음의 창고에서 낡은 의자 하나 꺼내 너에게도 편히 앉기를 권한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