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라는 개별성에 대하여
어린 시절부터 외로움이라는 인성이 남다르게 깊었던 나에게
성장하면서 복수가 아니라 하나라는 존재의 모습은 언제나 나를 질리게 했다.
깎아지른 부엉이 바위의 벼랑 끝에 홀로 앉았던 노무현은
홀로 이 세상 전체와 마주하고 있었다.
이때 이 하나는 외롭고 또는 위태로워 보이지만
모든 것들은 본래 혼자일 뿐이라는 운명과 직면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굴욕과 수치를 마중하고 있다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행위라면,
이 때,
인간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살아내는 것일 뿐인
존재론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우주의 공간으로 자신을 던지므로서
노무현이라는 개별적 가치가 보편적 신념과 의미로 태어나는
실존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노무현은 스스로 존재를 살 것인가,
실존이 될 것인가 라는 세상의 질문에 외로이 대답했을 뿐만 아니라
결국 그 스스로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
대처 세상의 위대한 사람이란 스스로 자신을 치열하게 연마하여
그 곡경의 시간을 이기고 끝내 저절로 자신을 완성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끝내 저절로 자신을 완성하는 사람은 저 너른 세상을 숨죽이게 한다.
사회적인 보편적 합리성이 확립되지 않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노무현이 부엉이 바위에서 직시하고 고발한 이 사회의 부조리와 불편성이라는
괴물때문에 늘 자승자박의 비극을 되풀이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이 부엉이 바위의 벼랑 끝에서 마주하고 내지른 세상에 대한 신음은
그에게 있어 선택의 의미가 아니라 가슴에서 체득되고 결국은 몸으로 체현된
사상의 실현으로서 이미 완벽한 개별성에 도달되어 있었으며,
그 개별성은 보편적이라는 불변의 궁극을 성취한 것이라
나는 굳게 믿는다.
따라서 오늘 나는
살아간다는 것의 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비극성에 한없이 전율한다.
-오늘로 님이 가신지 벌써 이십칠일이 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