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자화상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1930년대 독일 사회를 규정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으로, 다른 시대에 존재하는 사회적 요소들이 같은 시대에 공존하는 현상을 말한다. 크게는
사회 발전 단계가 달랐던 동양의 많은 사회들이 서양 자본주의 문화의 급속한 이입으로 인하여 숨가쁘게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이뤄지는 것을 볼 수가 있고, 작게는 질주하는 '세계화'에 의하여 지구의 각양각색이
거의 '동시 패션'이 되고 있는 상황을 가리킬 수도 있다. 해석에 차이는 있지만 많은 학자들이 한국 사회의
특징을 비동시성의 동시성으로 설명한다. 선진국에서나 일어날 현상과 후진국에서나 일어날 현상이 동시에
한 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급속히 현대화로 들어서려는 후진적 사회에선 아주 첨단적인
현상과 아주 후진적인 현상이 병존할 수 있단 것이다. 이런 모순된 현상이 동시에 사회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었다.전근대, 근대, 탈근대의 특징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참 많은 과거의 것이 있다.
물론 과거의 것이라고 다 나쁘진 않다. 문제는 유지되지 말아야 할 과거가 특정 세력에 의해 재생산된다는
점이다. 과거에 연연해하지 말자면서도 과거에 집착해 과거사 청산에 반대한다든지, 냉전이 끝난 구시대
독재정권의 전가의 보도인 '국가보안법'을 비호하는 비합리적인 과거의 세력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가로
막고 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 아닌가?. 과거의 세력이 그렇게 주장하는 세계적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집단주의적이고, 냉전적인 사유와는 단절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21세기 대한민국이 당면한 복합적인 비동시성의 동시성에 대한 과제들을 살펴보자.
전근대성 혁파의 개혁과제
-과도한 기득권 해체, 공평한 가치보상 도입
-가족주의, 파벌주의, 학벌주의, 연고주의
-지역이기주의, 식민주의, 천민자본주의
-권력의 무원칙, 몰상식, 정경유착, 관치금융, 정언유착
근대성 확보를 위한 개혁과제
-국가주의 및 집단주의를 벗어난 개인주의 윤리와 가치관 확립
-시민성 교육
-건전한 민주주의의 확립
-복지재정의 확충
-남북 분단의 극복
탈근대적 문제의 도전
-세계화(신자유주의)
-지식정보화
-탈이념화
-기후변화
-대체에너지
-녹색성장
-다문화
한국의 진보를 칭하는 세력은 근대성에 기반한 개혁과제에만 몰두하고 특히 복지국가와
냉전극복이라는 패러다임에 집중한다. 보수 세력은 탈근대적 개혁과제에만 몰두 (얼치기
수구세력 말고)하며 특히 이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지식정보화라는 패러다임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시대별 과제들이 정리되지 못하고, 복잡한 지역별,
계층별, 이념별로 구조적인 충돌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에 있다. 각 사안별로 진보-보수 간에
충돌과 격돌은 이미 근대 이후부터 우리가 익히 봐왔던 지겨운 레파토리건만, 탈근대로 진입한
21세기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오죽했으면 노무현이 '나는 구시대의 막차였다'라고 소회했건만
그것마저도 단지 그의 희망사항으로만 간주되었고, 그 구시대의 막차는 아직도 종착역에 도착하지
않고 연착되고 있기만 하다. 더우기 전근대적인 폐단들마저도 그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시대에 이러한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을 갖고 있는가 라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백가쟁명식 의견만 난무할 뿐, 그 어떤 전문가들도 이에 대해 구체적인 해답을
내놓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은 없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그것은 각 사안들에 대해서 계층별,
이념층 간에 서로의 이해가 민감하게 얽혀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을 흔드는 예민한 사안이기
때문에 이의 타협이란 실상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어떠한 세력이 양보와 타협을 통한 사회
통합을 외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립서비스 수준의 레토릭에 불과한 '구두선'에 그칠 뿐인 것이다.
참으로 우울한 21세기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