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쿠닌의 아나키즘에 관한 연구(펌)6
한편 모든 사람들이 과연 동등한 수준의 교육을 시종 받을 수 있느냐 하는 이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바쿠닌이 정작 중요시한 미래 평등 사회의 기반은 "출발선의 평등(l'?galit? du point de d?part)"이었다. 평등이 일단 확립된다고 해서 개인 능력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오히려 인류의 자산이 된다. 이러한 다양성으로 인해서 사회 구성원들은 상호 의존하게 되며 연대성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과학도 역시 무수한 전문 분야의 하나가 된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것은 과학적 사고력을 배양하는 일반 과학에 대한 기본 교육이다. 다만 과학의 전문 분야는 기성 사회에서처럼 특권계급에게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노동에 대한 아무런 편견 없이 그 분야에 종사하려는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에서 장애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의무를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지성과 분리된 신체적 힘이 우매해지듯이, 육체적 활동에서 분리된 지성은 쇠약해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 누구라 하더라도 어떠한 타인의 노동도 착취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며 모든 개인이 사람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다양한 자질 개발과 발휘를 위한 평등한 조건을 구비한 사회가 건설되는 것이다.
Ⅴ. 마르크스의 권위적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바쿠닌의 아나키즘은 제1인터내셔널(국제 노동자 협회)의 주도권을 놓고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는 국가 사회주의 노선과 대립하고 투쟁하는 가운데 사상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의 문제는 바쿠닌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자유론 및 혁명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바쿠닌 사상에서 국가란 자유를 억압하는 지배와 권위의 원천이며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자유를 쟁취하려는 혁명에서는 제1차적인 타도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자유로운 무국가 사회의 건설이라는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에 공통된 이상에도 불구하고, 국가 권력의 장악을 당면 목표로 정치적 혁명 및 개혁 노선을 추구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바쿠닌의 격렬한 비판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쿠닌은 마르크스의 주장에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엘리트 지배를 합리화하는 권위주의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자유로운 사회의 건설을 근원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획일적이고 전제적인 사회의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마르크스주의 역사 철학의 기반을 이루는 경제적 '결정론'은 선진 공업국의 공장 및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혁명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장은 경제 발전 상태가 낙후된 사회에서, 즉 바쿠닌의 지지 세력이 형성된 사회에서, 피억압 인민 대중이 주도하는 혁명의 의미를 평가 절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바쿠닌은 마르크스 사상이 자유 쟁취의 원동력인 인민 대중의 반란 본능과 의지를 무시하고 경제적 요소만을 강조한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A. 정치적 혁명 및 개혁 노선 비판
바쿠닌은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의 근본적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즉, 아나키스트가 국가의 파괴를 목적으로 삼는 데 반하여 마르크스주의자는 "국가의 정치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며, 전자가 자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닌 데 비하여 후자는 권위의 원리 및 실제에 대한 옹호자"인 것이다. 따라서 바쿠닌은 마르크스를 비스마르크와 동일한 국가주의자로 단정한다. 그의 표현을 빌면, 마르크스는 "비스마르크의 계승자"인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목표가 거대한 "인민국가"의 수립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정작 '인민국가' 건설을 주창했던 것은 마르크스라기보다는 라쌀이었다. 그렇다면 바쿠닌은 어떠한 근거에서 마르크스를 라쌀과 동일시하고, 더 나아가 비스마르크와 같은 부류라고 매도하였는가?
우선 바꾸닌이 마르크스를 또 하나의 비스마르크로 규정한 것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발발 직후인 1870년 7월 20일 마르크스가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보내어 당 기관지인 <폴크스쉬타트>지 (9월 11일자)에 게재된 편지의 다음과 같은 내용에 근거한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정복될 필요가 있다. 만일 프로이센 인들이 승리한다면, 국가 권력의 중앙집권화는 독일 노동계급의 중앙집권화에 매우 유용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독일의 부상은 유럽 노동운동의 무게 중심을 프랑스로부터 독일로 옮겨놓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프로이센의 승리 후 마르크스의 분신이라고 할 엥겔스도 한 서신에서 비스마르크가 자국에서 "정치적 중앙집권화"를 이룩함으로써 혁명에 크게 봉사했다는 생각을 밝힌 바 있다. 한편 바쿠닌은 이러한 내용의 서신에 접한 후, 프랑스의 재앙이 마르크스의 마음 속에 강한 희망을 일깨웠으며 동시에 비스마르크의 승리가 그에게 커다란 부러움을 일으켰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왕정의 승리가 결국은 자신을 후견인으로 하는 위대한 "인민국가"의 승리로 조만간 귀결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엥겔스와 더불어 자위하였다는 것이다. 바쿠닌은 이러한 근거에서 마르크스를 비스마르크와 다를 바 없는 국가주의자로 규정하였다.
다음으로 바쿠닌은 어떠한 근거에서 라쌀의 '인민국가수립론‘을 바로 마르크스의 목표라고 주장하였는가? 바쿠닌은 라쌀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혁명이 아닌 평화적 개혁을 추구했다는 것도 분명히 인식하였다. 그렇다면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바쿠닌이 어떻게 개혁 노선보다 혁명적 노선을 추구한 마르크스를 라쌀과 동일시했느냐 하는 것이다. 방법론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바쿠닌이 양자의 공통점으로 강조한 것은 어떠한 내용이며, 그러한 바쿠닌의 주장에 함축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양자에 공통된 국가주의 및 권위주의 경향에 대한 배격이었다.
라쌀이 자신이 조직한 당의 최우선적 목표로 내세운 것은 국가의 입법부와 행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보통선거권의 쟁취였다. 그런데 이 당은 엄격한 규율과 그 자신의 독재에 기초한 위계에 입각한 것이라고 바쿠닌은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가 라쌀과의 노선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터내셔널 속에서 이룩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라쌀의 생각으로는 당의 노력에 의해 합법적 개혁으로 보통 선거권을 쟁취한 후 인민들이 자신들의 대의원을 단지 인민 의회에 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의회는 일련의 법령에 의해서 인민에 적대적인 부르조아 국가를 '인민국가'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다. 인민국가의 첫 번째 과업은 노동자들의 생산 및 소비 협동조합에 무제한의 신용 대부를 실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 후에야 비로소 이 조합들은 부르조아 자본과 경쟁할 수 있게 되며 얼마 되지 않아 이를 이겨내고 흡수하게 된다. 이 흡수 과정이 완료되면,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혁되는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라쌀의 프로그램이며, 또한 독일 사회민주당의 프로그램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라쌀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에 속하는 것이라고 바쿠닌은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그 근거로 1848년의 <공산당 선언>과 1864년 마르크스가 인터내셔널 임시총무위원회 명의로 작성한 첫번째 <국제협의회 선언>을 제시하였다. 후자에는 '노동계급의 제일의 의무는 그 자신을 위한 정치권력의 쟁취에 있다'는 표현이 있었다. 또한 전자에는 '노동자 혁명을 향한 제1보는 프롤레타리아를 지배계급의 단계로 고양시키는 데 있으며,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생산 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고양된 프롤레타리아의 수중에 집중시켜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따라서 바쿠닌은 라쌀과 마르크스의 이론이 똑같이 노동자들에게 최종적인 이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당면한 중대 목표로서 '인민국가'의 수립을 권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인민국가'란 바로 '지배계급으로 고양된 프롤레타리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배계급으로 고양된 프롤레타리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프롤레타리아가 통치의 정상부에 있게 된다는 것인가? 바쿠닌은 여기에 강한 회의를 표시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독일인의 수 만해도 약 4천만명인데 이들이 모두 정부 요원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쿠닌은 전인민이 지배하게 된다는 이른바 '인민국가'의 내재적 모순을 국가의 속성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전인민이 지배하게 되고 지배받는 자는 아무도 없게 된다. 그렇다면, 정부도 국가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국가가 존재하게 된다면, 지배가 존재하게 되고 노예제가 존재하게 된다. ... 노골적이든 은폐되었든 노예제 없는 국가란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국가의 적인 이유다.
국가를 말하는 자는 지배를 말하는 자다. 그리고 지배를 말하는 자는 착취를 말하는 자다. 그리고 이것이 증명하는 바는, 불행히 아직까지 독일 사회민주당의 표어가 되고 있는 '인민국가'라는 말이 가소로운 모순이며 허구이며, ... 또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매우 위험한 함정이라는 점이다. 국가는 아무리 인민적 형태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항상 지배와 착취의 도구가 될 것이며, 따라서 인민 대중에게는 노예제와 빈곤의 영원한 근원이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해답은 결국 대의제일 뿐이라고 바쿠닌은 지적하였다. 라쌀 노선과 마찬가지로, 입법부와 행정부의 구성원 선출을 위한 인민의 보통선거권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결론이었다. 즉, 이들이 의미하는 '인민정부'란 결국 인민에 의해 선출된 소수 대의원들을 통한 인민의 지배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소수 지배층의 전제를 은폐하는 것으로서 인민 의지의 거짓 표현이라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고 바쿠닌은 경고하였다. 왜냐하면 '인민국가'의 지배층이 왕년의 노동자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이 일단 지배자나 인민의 대의원만 되면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며, 지배자의 높은 자리에서 육체 노
동의 세계 전체를 내려다보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할 수 없는 자는 인간 본성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바쿠닌은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도시 프롤레타리아 수천명에 의한 권력 행사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바쿠닌은 보았다. 결국 선출된 소수 집단에 권력이 위임되기 마련인 것이었다. 결국 이것은 기만적인 대의제 내지는 부르조아 지배체제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바쿠닌은 자신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사람에 대해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만든 법에 복종하는 것'이라는 반론도 예상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쿠닌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인민은 실제로 스스로 만든 법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만들어진 법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법에 복종하는 것이 이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후견적, 지배적 소수의 자의에 종속되는 것이거나 또는 자의로 노예가 되는 것 이외의 것은 결코 아니다.
바쿠닌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결국 소수자의 독재가 암시적인 것이며 단명할 것이라는 단서를 붙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시적 독재의 유일한 관심과 목적이 일정한 단계까지 인민을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교육시키고 양육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지배가 이내 불필요해지고, 국가는 그 정치적 성격, 곧 그 지배적 성격을 상실하여 경제적 이해관계와 공동체들의 완전히 자유로운 조직으로 저절로 변모되는 단계이다. 바쿠닌의 관점에서 이것이야말로 커다란 모순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만일 그들의 국가가 진정으로 인민의 국가라면, 왜 그것은 해체되어야 하는가? 만일 그 폐지가 인민의 진정한 해방에 필수적인 것이라면, 어떻게 감히 그것을 인민적인 것[국가]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결국 마르크스 및 라쌀의 국가주의 성향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바쿠닌은 '인민국가'를 포함하여 여하한의 국가도 전제와 노예제를 초래하는 "굴레"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류는 이미 너무 오래도록 지배받아 왔는바 그 불행의 원천이 이런 저런 형태의 지배(정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종류를 막론하고 지배(정부)라는 그 사실 자체에 있다는 것이었다.
B. 엘리트주의와 권위주의 비판
자유의 열렬한 옹호자인 바쿠닌은 마르크스 사상에 내재된 권위주의 및 엘리트주의의 요소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특히 이러한 요소가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의 함의 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보았다. 그것은 '과학'의 이름과 그 권위로 일반 대중을 지배하려는 소수 지식인의 독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고 해서 바쿠닌이 과학 자체를 배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가 모두 미신을 끝장내고 신앙을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과학에 대한 옹호자"라고 보았다. 양자의 차이점이 있다면, 전자가 과학을 "전파"하고자 노력하는 데 반해서 후자는 이를 "부과"하고 싶어 한다는 데 있다. 바쿠닌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의 전파로 마침내 확신을 얻은 인간 집단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이해에 부합하는 그들 자신의 운영에 의해서 창발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밑에서부터 위로 스스로 조직하고 연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몇몇 우월한 지성인들에 의해서 미리 검토되고 대중들에게" 부과되는 계획에 의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바쿠닌의 생각으로는,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그토록 많은 어설픈 시도에다 아직도 자기들의 노력을 더하는 척하는 모든 "박사들과 인류의 선생들"의 심오한 지성 속에서보다는, 오히려 인민 대중의 본능적 열망과 진정한 욕구 속에서 훨씬 더 많은 실천적 이성과 정신이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입장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권위주의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활발한 논의, 즉 노동자 세계 속에서 그 나름의 사상적 발전을 죽이게 되는 것은 바로 공식적 이론의 존재이다. 이러한 비상하게 위대한 두뇌의 고립된 활동에 의해서 과학적으로 발견된 공식적 진리(v?rit? officielle)가, ... 즉, 마르크스의 시나이 산정에서 선포되어 모든 사람에게 부여되는 진리가 있게 되는 순간부터 토론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바쿠닌은 이러한 권위주의적 '과학적' 사회주의의 노선에 입각한 혁명이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국가와 소수 엘리트의 독재 체제로 귀결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아나키즘의 이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 노선에 따른 혁명 과업이란 구체적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한 후 "국가에 의한 재산가 및 자본가의 착취"와 "토지 및 자본의 몰수"를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대한 경제적, 사회적 사명을 수행하려면 이러한 국가는 강력하고도 고도로 중앙집권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의 정부는 대중을 정치적으로 통치하는 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활동 - 생산, 부의 분배, 농업, 공장 건설, 무역의 조직과 통제, 유일한 은행인 국가에 의한 생산부문 투자 - 을 자기 수중에 집중시키며, 대중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방대한 과학"과 아울러 이를 담당하는 두뇌 집단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과학적 지성의 통치"로서 모든 지배체제 중에서 "가장 귀족적이고, 가장 전제적이고, 가장 오만하고, 가장 고압적"인 것이다.
또한 이것은 새로운 계급, 새로운 지위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과학의 이름으로 지배하는 소수"와 "무지한 대다수"로 양분되는 것이다. 라쌀과 마르크스의 저작과 연설에서 끊임없이 마주치게 되는 '학식 있는 사회주의자', '과학적 사회주의' 같은 말들이 오로지 증명하는 점은 이 사이비 인민국가라는 것이 새로운 "소수의 실제적인 귀족들"이나 "사이비 지식인들"에 의해서 인민대중에게 자행하는 전제적 지배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배우지 못한 인민들은 그 때문에 모든 지배 업무로부터 해방되어 모두 지배당하는 무리로 편성된다. 바쿠닌은 "웬 해방이냐!"라고 개탄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유는 지켜질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병영 체제"와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획일화된 남녀 노동자들이 북소리에 맞추어 기상하고 취침하며 일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반면에 능력과 지식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배의 특권이 주어지는 것이다. 바쿠닌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이란 오직 독재 - 물론 그들의 - 만이 인민의 의지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쿠닌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그 어떠한 독재도 그 자신을 영속화시키는 이외의 다른 목표를 갖고 있지 않으며, 그것을 용인하는 인민 속에 오로지 노예제만을 잉태시킨다. 자유는 자유를 통해서만 ... 창조될 수 있다.
C. 결정론 비판
바쿠닌은 마르크스의 경제적 결정론을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이 이론은 역사적 발전 단계론에 입각하여 자본주의 선진국의 사회주의 혁명과 이를 담당할 공장 노동자 및 도시 프롤레타리아에만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바쿠닌의 지지 기반인 라틴권 유럽에서의 사회 혁명을 역사 발전에 역행하는 것으로 평가 절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바쿠닌은 마르크스가 역사 발전 및 혁명의 추동력과 주체를 획일적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바쿠닌은 우선 마르크스의 경제적 결정론과 그의 혁명 노선 사이의 불일치를 지적함으로써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려고 하였다. 바쿠닌은 그의 국가론에서 비판을 시작하였다. 바쿠닌은 마르크스가 경제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비경제적 요소들을 지나치게 무시한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에 있어서 국가란 "경제 여건의 산물"이자 그 "충실한 반영"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빈곤" 즉 경제적 착취구조가 "정치적 노예제, 즉 국가를 낳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결론은 '국가를 바꾸려면 경제를 바꾸라'였다. 그 역은 마르크스에게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역이란 바로 바쿠닌의 노선이었다. 즉 "정치적 노예제인 국가는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서 빈곤[경제적 착취 구조]을 주체적으로 재생산하고 유지시키기 때문에 빈곤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분쇄해야 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경제적 결정론자인 마르크스는 아나키스트들이 정치적 노예제, 즉 국가를 빈곤의 실제 원인으로 규정하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이와는 완전히 모순되게 자파 세력,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에게는 정치권력 장악과 정치적 자유 획득을 경제 해방의 필수불가결한 선행조건으로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엄격히 경제적 차원에서 생각하여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된 선진국에서만 혁명을 선도, 장악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역사적 발전 단계론에 입각하여 아나키스트들을 비판하는 점은 "역사의 완만한 진행을 재촉하고 앞서려고 한다"는 것, 그리고 "연속적인 진화의 확고한 법칙을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쿠닌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역사발전에서 중요한 요소의 하나를 외면했던 것이다. 즉, 각 종족 및 민족의 기질 및 특성이다. 이것은 처음에는 경제적, 역사적 제 조건에 의해서 형성되지만, 일단 형성되면 경제적 조건과는 별도로 한 나라의 경제력의 운명과 발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바쿠닌은 주장하였다. 이러한 것들 중에서 중요한 것은 "반란 본능의 정도"였다. 그는 독일 민족성에는 많은 장점이 있으나, 이것만은 결여되어 있다고 보았다.
바쿠닌은 이러한 문제를 다가오는 사회 혁명의 주체와 직결시켰다. 즉 반란 본능이 결여된 "독일 프롤레타리아"가 사회 혁명을 주도하기보다는 오히려 혁명이 다른 곳으로부터, 아마도 "남국으로부터(du Midi)" 이들에게 다가올 것이라고 바쿠닌은 예상했던 것이다. 바쿠닌이 말하는 남국이란 남부 유럽, 즉 이탈리아 및 에스파니아, 그리고 더 넓게는 프랑스를 포함한 라틴 문화권을 의미하였다. 또한 남부 유럽과 러시아에는 공업이 낙후되어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세력이 미약하지만 그만큼 부르조아 자본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빈민 대중이 있었다. 바쿠닌에게는 이들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의 꽃"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의미하는 프롤레타리아의 꽃이란 무엇보다도 이 엄청난 대중, 문명화되지 못하고 혜택받지 못했으며 비참하고 글을 모르는 이 수백만의 사람들이다. 바로 정부의 이 영원한 먹이, 이 엄청난 천민 대중들이다. 이들은 부르조아 문명에 의해서 거의 더럽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내부에, 자신들의 열정, 본능, 열망 속에, 그리고 자신들의 집단적 위치에서 비롯되는 모든 궁핍과 빈곤 속에, 미래 사회주의의 모든 씨앗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들만이 오늘날 사회 혁명을 유발하고 승리로 이끌기에 충분한 역량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바쿠닌은, 마르크스가 경제 결정론에 근거하여 그리고 특히 독일 프롤레타리아를 염두에 두고 주목했던 공장 노동자와 도시 프롤레타리아보다는 반란 본능을 지닌 라틴권 유럽과 러시아의 노동자, 농민, 빈민, 천민을 포함한 인민대중을 사회 혁명의 주체로 파악했던 것이다.
Ⅵ. 결 어
바쿠닌은 1876년 7월 1일 베른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아나키즘의 종말이라기보다는 아나키즘 운동의 본격적인 서막이었다. 바쿠닌이 제1인터내셔널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그 이론 체계를 세웠던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으로부터 19세기 말 - 20세기 초 아나키즘 운동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꼬뮌주의적 아나키즘이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꼬뮌주의적 아나키즘의 대표적 이론가인 크로포트킨을 포함하여 Elis?e Reclus, Jean Grave, Sebastien Faure, Emile Pouget (이상 프랑스), Carlo Cafiero, Enrico Malatesta, Covelli (이상 이딸리아), R. Mella, A. Lorenzo (이상 에스빠냐), Johann Most (독일), August Spies, Albert Parsons (이상 미국), P.L. Lavrov (러시아) 등은 모두 바쿠닌의 계승자로 볼 수 있다.
바쿠닌 이후 아나키즘 운동의 전개는 본 논문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로서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후일을 기약하고자 한다. 다만 본 논문의 테두리 안에서 아나키즘 운동과 관련하여 필자로서 주의를 환기하고 싶은 것은 아나키즘 사상, 특히 바쿠닌 사상에 내재된 실천적 요소이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는 무엇보다도 바쿠닌 사상의 핵심적 부분인 자유론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가 추구한 자유는 물론 개인의 자유이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개인의 자유'였다. 바쿠닌은 이를 '단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못하면 나는 자유롭지 않다'는 식으로 극단적으로 해석하였다. 즉 그는 자유의 연대성 내지는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는 자유의 고립성을 전제하는 사회계약론을 신랄히 비판하였다. 즉 계약으로 자유의 일부를 양도함으로써 성립되는 사회 이전의 상태 - 개개인이 고립되어 있던 이른바 '자연상태' - 에서 가장 완벽한 자유가 존재한다는 계약론의 전제에 바쿠닌은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자유는 본원적인 것도 아니며 처음부터 완벽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바쿠닌에게 있어 자유란 인간이 사회 속에서 만들어 가고 확대해 가는 것이었다. 즉 자유란 실천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었다.
자유가 연대적이라는 논리와 자유가 인간의 실천에 따라 창출된다는 논리의 결합은 바쿠닌으로 하여금 자유의 전사가 되도록 하였다. 바쿠닌의 자유론에서 한 개인의 자유는 얼마든지 한 민족의 자유로도 치환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피억압 민족이나 민중이 있는 곳이라면 봉기의 성공 가능성 여부에 개의치 않고 어디든지 달려갔던 것이다. 그는 파리에서 1848년 2월 혁명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1848년 6월 프라하 봉기와 1849년 5월 드레스덴 봉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시베리아 유형 생활에서 탈출한 뒤로 비록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1863년 폴란드 봉기를 지원하는 원정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는가 하면 1870년 9월 보불전쟁의 와중에서 발발한 리용 봉기에 참여하였으며 1874년 8월 불발로 끝난 볼로냐 봉기에 참여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므로 필자는 바꾸닌의 이러한 행동주의와 혁명 지향성이 바로 그의 자유론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