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쿠닌의 아나키즘에 관한 연구(펌)3
B.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가치관과 인민의 정서
두 번째로 바쿠닌의 아나키즘 사상의 형성 과정에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러시아의 인텔리겐챠의 가치관과 인민의 정서에서 오는 영향이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i) 인민 예찬, ii) 권력 국가의 배격, iii) 집단적 소유 내지는 공유제에 대한 신봉, iv) 농민 봉기의 심성과 전통 등으로 요약된다. 이 중에서 i)이 순수하게 인텔리겐챠의 가치관과 관련된 것이라면 iv)은 거의 전적으로 인민의 정서와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ii)와 iii)은 양쪽에 공통된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바쿠닌이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일원으로서 공유한 사상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하는 것과 아울러 바쿠닌은 어떠한 점에서 동시대의 인텔리겐챠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 성향을 지녔는지 하는 것이 드러날 것으로 믿는다.
인민 예찬은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이상으로서 그들의 독특한 사회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자신들이 향유하는 문화가 비참하게 살아 인민의 노동과 희생의 대가로 이룩된 것임을 자각하는 무거운 책임 의식 같은 것이었다. 바쿠닌이 청장년기를 보낸 1840년대의 러시아 인텔리겐챠들은 대체로 귀족 출신이었는데, Berdyaev에 따르면 이 시대에 인텔리겐챠나 토지귀족의 일원임을 자각하는 것은 인민에 대한 죄의식이며 의무감을 의미하였다. 즉, '참회하는 귀족'은 자신들의 기생적 성격을 자각하고 반성하는 데서 비롯된 독특한 러시아적 현상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Berdyaev는 농노제의 불의에 마음의 상처를 받고 고뇌하였다고 최초로 표명한 라지시체프의 글 <뻬쩨르부르그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1790)>에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탄생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바쿠닌은 유럽에서 혁명 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후 러시아로 압송되어 수형 생활을 하며 짜르 니꼴라이 1세에게 제출해야 했던 <참회록>(Ispoved')에서 인텔리겐챠로서의 고뇌와 인민에 대한 신뢰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저는 이른바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평범한 인민, 선량한 러시아인, 모든 이로부터 억압받는 농부가 현재 처한 불행한 상황에 가장 놀랐으며 괴로워하였습니다. 저는 다른 어떠한 계급보다도 더 크게, 그리고 범용하고 방탕한 러시아 귀족 계급보다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게 그들에게 공감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갱생의 모든 희망을, 러시아의 위대한 미래에 대한 모든 믿음을 걸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저는 신선함, 위대한 영혼, 외국의 부패함에 감염되지 않은 빛나는 지혜, 그리고 러시아의 힘을 보았습니다.
인텔리겐챠에게는 인민이 핍박받는 속에서도 보여 주는 생명력이 신비하게 느껴졌다. 바쿠닌은 1845년 파리의 급진적인 언론지인 <라 레포름>지에 게재한 공개서한에서, 러시아 인민이 "결코 부패되지 않았으며, 단지 불행할 뿐"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들의 "반쯤 야만적인 성격" 속에는 "무엇인가 활력적이고도 원대한 것"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인텔리겐챠는 인민 속에 진정한 사람의 비밀, 교육받은 지배계급에게는 은폐된 비밀이 보존되어 있다고 믿었다. 슬라브주의자, 도스또예프스키, 톨스토이는 인민 속에 종교적 진리가 숨겨져 있다고 보았다. 한편 비종교적이거나 종종 반종교적인 게르샬, 바쿠닌 등은 인민 속에 사회적 진리가 숨겨져 있다고 믿었다. 바쿠닌에 따르면, 러시아 인민은 혹독한 노예제와 온갖 충격에도 불구하고 "완벽히 민주적인 본능과 자세"를 지닌 존재였다.
이러한 인민에 대한 절대적 신봉, 진리와 정의의 수호자로서의 인민에 대한 예찬이 바로 러시아 인민주의의 토대를 형성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인민이 의미하는 것은 동포에 대한 착취의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운 근로 인민, 특히 노동계급과 농민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비종교적이고 혁명적인 인민주의자뿐만 아니라, 슬라브주의자와 토스토예프스키, 및 톨스토이 같은 종교적 인민주의자까지도 인식을 같이하였다. 이러한 점들은 프루동이 프랑스 노동계급을 '보편계급'이라고 도덕적으로 이상화한 점과 흡사하여 매우 시사적이다.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이러한 가치관을 공유한 바쿠닌으로서는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프루동의 노동자주의를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즉 러시아 인민주의는 인민의 대다수인 '농민에 관한 이념'이지 농민에 의해 형성된 이념이 아니며, 또한 농민 속에 뿌리를 내린 이념도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최근의 연구에서 Hughes는, 슬라브주의자들의 농노제에 대한 반감 표명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전기 작가들이 언급하는 지주인 슬라브주의자들과 농노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완전히 감상적 허구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적어도 이러한 점에서는 바쿠닌이 여느 인텔리겐챠와 크게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Carr의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다. 바쿠닌은 1862년 런던에서 <인민의 대의: 로마노프, 푸가초프 또는 뻬스샹리?>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러시아 농노 출신의 망명객 마르차노프의 영향을 받아 씌여진 것이다. 바쿠닌 같은 지식인이 어떻게 무식한 농민의 제자가 될 수 있는지, 그의 동료인 게르샬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게르샬이 러시아 인민을 이상화하였지만, 자신의 사상을 한 농노로부터 빌려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이상화한 마르크스가 한 직공으로부터 자신의 사상을 차용하는 것과 같았다. 오직 계급 차이를 거의 의식하지 않았던 바쿠닌만이 농노 출신의 마르차노프와 스스럼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바쿠닌이 자신을 인민에 일치시키고 인민 정서에 될수록 공감하려는 자세는 단순히 관념적이거나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 속에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따라서 바쿠닌은 프루동처럼 지식인의 후견과 권위를 부정하는 노동자주의에 심정적으로도 공감할 수 있었다고 보여 진다.
프루동의 노동자주의가 반국가주의로 귀결되듯이,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인민예찬은 권력국가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났다. 슬라브주의자들, 좌파 인민주의자들, 인텔리겐챠에게 국가는 인민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인민의 몸속에 붙어 있는 기생충이었다. 이들에게 광대한 국가나 제국은 인민에 대한 배신이며 러시아적 이념의 왜곡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아나키즘적 요소는 19세기 러시아의 여러 사회사조 속에서도 나타난다. 러시아 인텔리겐챠 중에서 국가를 좋아한 사람은 거의 없으며 국가를 스스로의 것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성향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했던 레온치예프마저도 권력국가에 대한 러시아적 이론은 오히려 따따르-독일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간주하고 러시아 인민이나 슬라브인의 세계는 본래 무정부적인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창조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진단은 바쿠닌도 이미 내린 바 있다. 그는 "따따르-독일적 멍에와 슬라브의 위대한 자유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며, "슬라브인들이 스스로 발전하도록 방치되었더라면 결코 국가를 세우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바쿠닌은 이러한 주장을 다음과 같은 역사적 고찰을 통하여 뒷받침하려고 하였다.
전체 러시아 제국의 형성의 역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여기에 참여했던 것은 따따르의 압제, 비잔틴의 축복[종교], 독일적인 행정-군사-경찰의 계몽주의 등이다. 불쌍한 대러시아 인민과 그 다음에 제국에 합병된 소러시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인민들이 제국 창건에 단지 그 배후에서 참여했었다. 따라서 슬라브인들이 결코 스스로 앞장서서 그들 자신의 국가를 세우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슬라브인들은 주로 평화적인 농경 종족이다. 이들은 게르만 제 종족이 고취시키는 호전적인 정신에 생소하며, 따라서 일찌기 게르만족들에게서 나타나는 국가주의적 열망에도 생소하였던 것이다. 공동체들 사이에 영속적인 정치적 유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외족의 침입 같은 공통된 위험이 닥쳐올 때는 임시적인 방위 동맹이 결성되었다. 위험이 지나가면 이내 정치적 통합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요컨대 슬라브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존재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바쿠닌에게 있어 국가란 무엇보다도 독일적 - 나중에는 마르크스주의까지 포함한 - 영향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슬라브인의 정서와는 합치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견해들은 어느 정도 과장된 것으로 러시아의 역사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러시아인은 한편으로 전제국가의 형성을 온순하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즉 러시아인의 심성에는 대제국 형성에 대한 수동적 동의가 내재되어 있었다. 바쿠닌도 이 점을 시인하였는데, 특히 포뜨르 대제 시대에 "인민의 본능"은 "위대한 미래에 대한 예감으로 자극받고 있어서 규율과 통일과 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로부터 도피하고 대항하려는 성향을 보여준 것도 사실이다. 바쿠닌은 표트르 대제부터 알렉산드르 1세까지의 시대를 인민에게 "강제된 지속적인 폭력의 역사"라고 하였으며, "인민은 이에 예속"되어 "인민 스스로 현명한 척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그들의 내면적 본성은 이 일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Berdyaev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이 '그들'이라고 하면 국가, 제국, 권위를 말했으며, '우리'라고 하면 인텔리겐챠, 사회, 인민, 해방운동을 의미하였다. 즉 국가는 '그들'이었으며 '타인들'이었다. 러시아인이 말하는 '우리'는 모든 국가로부터 낯선 별개의 차원에서 살았다.
그렇다면 러시아인의 이러한 부정적 국가관은 어떠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배태된 것인가? 이러한 국가관 형성의 주요 계기는 1660년대에 시작된 교회 분열과 1700년대부터 본격화된 표트르 대제의 개혁이었다. 정교회 분리파 내지는 정통신앙 고수파(staroobriadtsy)에 아나키즘 성향이 존재하였다. 1660년대 교회분열의 근저에는 '제3의 로마'로서의 러시아 제국이 진정한 정교의 나라인가에 대한 의혹이 깔려 있다. 본래 러시아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신앙만이 정교이며 참된 신앙이었다. 참된 신앙은 참된 국가와 연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야말로 참된 국가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참된 제국은 지상에 이미 그림자도 없었다. 1660년대부터 러시아에는 적그리스도의 지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참된 제국은 공간적으로는 지하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되었고, 시간적으로는 묵시론적으로 채색된 미래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교제국은 지하로 들어갔다. 참된 왕국은 어떤 호수의 밑바닥에서 발견될 도시 '끼쩨쉬'(Kitezh)였던 것이다.
분리파의 입장에서, 국가로부터의 이탈은 국가에는 진리도 정의도 없다는 주장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국가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적그리스도였다. 따라서 국가는 신국, 그리스도의 나라에 반역하여 세운 케사르의 국가였다. 이러한 관점이 19세기 인텔리겐챠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토스또예프스키, 통스토이, 호마코프는 모두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바쿠닌도 이 문제에 대하여 대동소이한 견해를 지녔다. 그는 분리 종파(religioznye sekty)의 반국가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 바 있다.
땅을 갈거나 수렵, 어로에 종사하는 러시아 인민, 농민, 이른바 서민(chernyi narod)은 200여개의 분리 종파로 갈라져 있는데 모두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현재의 질서를 거부하고 짜르의 권력을 적그리스도의 권력으로 간주하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모스크바 정부가 이미 1660년대에 교회 분열로 인민의 의식 속에 종교적 회의를 낳게 하였다면, 이 회의는 포뜨르 대제 시대에 와서 더욱 굳어졌다. 포뜨르는 적그리스도라는 전설이 생겨났다. 정교의 정신 토양에서 형성된 문화 유형을 신봉하는 슬라브파의 입장에서 포뜨르의 서구화 개혁은 러시아에 대한 배반이었따. 포뜨르 대제의 개혁으로 유럽화한 일부 러시아인들이 '자기 나라에 대한 식민주의자'가 되었으며 반면에 인텔리겐챠는 이후 더욱 소외되었다. 페테르부르그 제국에 대한 모스크바의 오랜 원한은 슬라브주의자인 콘스탄틴 악사꼬프를 통해서 표출되었다. 그는 포뜨르 대제의 개혁을 비난하는 과정에서 인민 공동체와 도덕의 이름으로 국가주의와 법치주의를 부정하였다. 악사코프는, 마지못해 정치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수를 줄임으로써 이른바 '정치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취지에서 기묘하게도 독재군주정을 옹호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쿠닌이 아나키즘 사상에 경도되도록 자극을 준 최초의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1867년의 한 서신에서 바쿠닌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미 그 당시[1830년대 말]에도 꼰스탄틴 세르게비치[악사코프]와 그 친우들은 뻬쩨르부르그 국가와 국가 일반에 대한 적이었으며, 이러한 태도 속에서 그는 이미 우리를 예견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슬라브주의자들의 영향으로 바쿠닌은 포뜨르를 "러시아 인민의 대박해자"로 규정하고 포뜨르의 개혁과 그가 건설한 제국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러시아 국가는 인민에게 "소외감"을 더욱 심화시켰는데, 그 이유는 첫째로 인민에게 비인간적 외래 문명이 강요되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정복국가를 지향하면서 "인민은 목적이 아니라 단지 정복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인민에게 강제된 유럽 문명은 주로 "독일"의 것이었는데, 바쿠닌에 따르면, "그 당시 독일에서는 윤리적이고 인간적인 법들에 무관심"하였으며 자국 "인민에 대한 걱정이 전혀 없이 그들을 팔아넘기고 감정도 없는 물건인 양 흥정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또한 포뜨르는 러시아를 "외국민을 노예화하기 위한 기계"로 만들었으며, 그것이 "대외적으로 한층 확대될수록 대내적으로는 자국 인민에게 한층 생소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정복 지향적인 기계적 국가는 자국 인민의 "삶의 근본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정부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양의 병사와 돈을 제공하는 기계" 즉 "정복 기계"로 만들었기 때문이며, "자국 인민을 피정복민처럼 냉대하며, 대외적으로 그렇듯이 대내적으로도 억압적인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러시아의 국경이 한층 확장될수록 돈과 병사가 한층 더 요구되었으며, 그럴수록 정부는 한층 더 억압적으로 되었던 것"것이다. 1840년대 말에 행해진 러시아 국가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후일 바쿠닌의 아나키즘의 기저를 이루는 반국가주의와 특히 1870년대 독일 군국주의 국가에 대한 비판을 예시하는 것으로서 슬라브주의자들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한 사람으로서 바쿠닌이 보여준 인민 예찬과 권력국가 배격의 논리에는 프루동의 노동자주의 및 반국가주의와 쉽사리 결합될 수 있는 친화성이 있었다. 그러나 바쿠닌은 이상적인 재산 소유 형태에 대하여 프루동과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하였다. 바쿠닌은 자타가 인정하는 프루동의 후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산업 운용에 있어서 집산주의를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옛 스승과는 달랐다. 그는 노동과 과학의 전 분야에 걸친 협동적인 사회조직이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는 전제 조건으로서 "모든 자본과 노동 용구가 토지까지 포함해서 집단적 소유의 이름으로 노동에 귀속"되는 것을 제시하였다. 이에 비해 프루동은 생산도구를 개별적으로 소유한 장인들의 협동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가? Lichtheim에 따르면, 그 이유는 바쿠닌이 게르샬과 공유하였던 촌라 공동체에 대한 애정 탓에 집합체도 존립의 권리를 갖는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Lichtheim의 견해는 바쿠닌이 표명한 집산주의에서 그 러시아적 기원을 지적한 것이다.
인텔리겐챠에게 러시아 촌락 공동체가 갖는 의미는 서유럽의 개인주의와 이기심에 대한 안티테제였다. 바쿠닌은 자신의 <참회록>에서 서유럽 사회에 팽배한 이기주의를 신랄히 비판한 바 있는데 이는 니꼴라이 1세마저도 "경탄할 진실"이라는 메모를 여백에 남길 정도로 러시아인 대부분이 공감하는 문제였다. 또한 그의 동료인 게르샬은 서유럽 사회주의와 노동자들 속에서까지 부르조아 정신이 승리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본 서유럽 노동자는 '부르조아 무산자'였다. 부르조아지를 움직이는 것이 '탐욕'이라면,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질시'였던 것이다. 게르샬은 이러한 세상을 구할 사람이란 러시아 농민이라고 믿었으며, 부르조아화한 유럽인에게서보다는 농노제 하의 계몽되지 못한 러시아 농민에게서 더 위대한 인격의 원리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러시아의 촌락 자치체나 경제적 후진성에서 구원을 찾았으며, 따라서 서유럽보다는 러시아에서 더 용이하게 사회주의가 존재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었다. 게르샬은 이러한 러시아 사회주의의 개념을 발전시켜가던 1847년에 바쿠닌을 다시 빠리에서 만났다. 이러한 만남에서 바쿠닌은 서유럽주의자였던 게르샬의 사상적 변화를 느끼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슬라브주의자들도 서유럽의 부르조아 자본주의 문명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서유럽 사회의 부패 원인이 부르조아 문명과 이로 인한 사람의 통일성의 훼손에 있다고 보았다. 악사코프는 이와 대비하여 러시아 인민 공동체에서 이기주의와 독선이 배제된 개성이 자유롭게 발현되는 이른바 '합창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이처럼 슬라브주의자들은 게르샬 유형의 인민주의자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특유의 유기적인 경제 생활구조로 파악하였던 촌락 공동체의 옹호자였다. 바쿠닌의 경우, 비록 공동체의 가부장제가 지닌 권위주의에는 비판적이었지만, 그 역시 이러한 관점을 공유하였다. 그에 따르면, 슬라브인들은 안으로는 "촌로들이 주도하되 선출제에 입각한 가부장제 관습에 따라 다스려지는 자신들의 공동체" 속에서 그리고 밖으로는 "국가에 대한 단호한 대립 관계"를 의미하는 "공동체의 거의 절대적인 자치" 속에서 "인간적인 형제애의 관념"을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구현하면서 "모두 평등하게" 지냈던 것이다.
그러나 촌락공동체에서 바쿠닌이 무엇보다도 주목했던 것은 바로 토지 공유제(obshchinnyi uklad)였다. 토지는 공동체에 속한 것이며, 개개 농민은 단지 그에 대한 용익권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용익권도 근원적으로는 토지를 개인에게 한시적으로 분배하는 공동체에 속한 것이다. 토지 재분배는 20-25년마다 실시된다. 상속권은 동산에서만 존재하며 토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바쿠닌은 슬라브인들이 공동체 속에서 "모두 동일하게 공유지를 활용하여 사는 가운데 귀족계급을 갖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고 하였다. 따라서 "모든 토지는 그것을 땀으로 적시고 자기 손의 노동으로 비옥하게 하는 인민에 속한다는 전 인민적 확신"이야말로 러시아 인민의 이상의 기반을 이룬다고 바쿠닌은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후일 "땅은 그 모든 부대 자원과 아울러 모든 사람의 소유이나, 그것을 경작할 사람들에 의해서만 점유"되어야 한다는 혁명 강령 속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다. 따라서 바쿠닌은 "농민이 짜르, 국가나 영주의 이름으로 경작하는 땅이 본래는 자신에게 속한다는 것"을 "마치 농민이 모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며" 아울러 "공유제를 파괴하는 것"은 제 아무리 선의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허용될 수 없는 것으로 그것은 "지주에게는 사형 선고"와 같은 일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바쿠닌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인텔리겐챠에게 널리 퍼져 있던 것이었다. 슬라브주의자로서 대지주였던 먀꼬프도 유일한 토지 소유주인 전체 인민이 자신에게 토지의 부를 양도하고 토지 점유권을 위탁한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조건에서 사유재산의 개념은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촌락공동체를 예찬했던 러시아인에게 일반적으로 로마법적인 재산 개념은 생소한 것이었다. 즉 서 유럽인들이 사유재산에 대하여 갖는 절대적 개념은 부정되었다. 모스크바 시대의 러시아에서는 짜르가 명목상 유일한 토지 소유주였기 때문에 토지 소유상의 범죄를 몰랐다고 전해진다. 재산이나 절도에 관한 러시아 법률의 판결은 사회제도로서의 재산에 대한 태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태도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러시아 정신에서 중요한 것은 재산의 원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바로 여기에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부르조아 정신과 투쟁하고 부르조아 사회의 수용을 거부하게 되는 요소가 있었다. Berdyaev가 주장하였듯이, 바로 이러한 러시아인의 부정적인 재산관념 때문에, 사회주의 - 이 말을 교조적 의미에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고 전제할 경우 - 는 러시아적 특성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으며,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이야말로 이 당시 러시아인의 지혜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프루동은 대규모의 자본주의적 재산만을 거부하였을 뿐, 생산자들이 개별적으로 자신들의 도구를 소유하는 사회에 대한 비젼을 비난한 적이 없다. 그는 소농이나 장인의 경제적 독립성을 옹호하였을 뿐 아니라 예찬하였다. 특히 그는 국가 권력의 위협에 대한 견제력으로서의 사유재산을 지지하였다. 프루동이 배격한 것은, 사용료 징수권(프루동의 표현으로는 droit d'aubaine)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재산이었다. 이러한 재산권 행사로 인한 소득은 자보에 대한 이윤, 토지에 대한 지대, 대부에 대한 이자 등의 불로소득으로서 정의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따라서 프루동이 원했던 것은, 사회 정의에 어긋나는 재산 증식으로부터 사유재산제를 정화시키는 것이지, 재산을 집단적으로 소유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즉 가가 요구한 것은 불의의 폐지였지, 불평등의 폐지가 아니었다. 프루동은 이렇게 말했다. "재산은 공동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사회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을 물어뜯는 방식으로 광견병을 치유할 수는 없다." 요컨대 프루동은 집산주의자가 아니었다.
바쿠닌은 프루동의 이러한 입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부분적인 원인은 Lichtheim의 주장대로, 바쿠닌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알게 된 데에 있었다. 독일어를 전혀 몰랐으며, <자본론> 제1권이 발간되기 전에 죽었던 프루동과는 달리, 바쿠닌은 마르크스의 중요성과 가치를 분명하게 인식하였다. 그럼으로써 바쿠닌은 프루동의 이름과 결부된 반자본주의 이론에 어느 정도 '공산주의적인' 요소를 슬며시 가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후일 마르크스주의자인 쁘레하노프가 바쿠닌을 가리켜 "가증스러운 공산주의와 심지어 마르크스주의까지 뒤섞인 프루동주의자"라고 비난했던 사실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바쿠닌은 "노동 도구의 집단적 소유화(l'appropriation collective)"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질서의 창조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공유하는 목표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원인은 Lichtheim이 앞서 지적한대로 바쿠닌에게서 나타나는 러시아인이 전통적 가치관 속에서 규명되어야 한다.
바쿠닌은 1849년 라이프치히에서 발행된 <러시아 상황>(Russische Zu-st?nde)이라는 소책자에서 토지공유제에 대한 신념이 러시아 인민의 특징임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러시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농노제, 즉 개인의 자유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토지에 대한 권리에 관해서이다. 농민들은 이에 대해서 아주 솔직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 주인의 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nasha) 땅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사회혁명으로서의 러시아 혁명의 성격은 미리부터 결정되어 있으며, 또한 인민들의 전반적 성격 속에, 그리고 그 공유제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바쿠닌의 이러한 가치관에서, 훗날 프루동의 '시대에 뒤진 개인주의적 유산'을 '반 권위주의적 집산주의'로 대체할 수 있었던 요소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바쿠닌은 혁명 전략에서도 러시아 농민 봉기(bunt)의 전통을 계승함으로써 비폭력적 수단을 고수하였던 프루동과 커다란 차이를 드러내었다. 바쿠닌은 근로 인민에게 숨겨진 진리와 계몽되지 못한 대중을 신봉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으뜸가는 반란 민중으로 간주한 러시아 인민을 신봉하였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인민주의자였다. 이 점에서 바쿠닌은 게르샬과도 달랐다. 게르샬이 느낀 농민층의 매력은 주로 그들의 공동체 제도에 한정되어 있었다. 물론 게르샬도 한때 혁명적 파괴에 매력을 느낀 적도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과적인 것이었다. 반면에 바꾸닌은 집단 폭력과 방화의 전통을 지닌 러시아 농민층에 점점 더 이끌리게 되었다.
바쿠닌은 스제판 라진과 드가체프를 자신의 정신적 선구로 인정하였다. 두 사람은 전형적인 러시아인으로서 이들에 대한 기억은 인민들 사이에 간직되어 있었다. 러시아인은 스스로를 대제국 건설의 도구와 재료로 순순히 바치는 심성도 지니고 있었지만 동시에 봉기, 소요, 아나키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 인민 속에 내재된 탈법적인 라진-드가체프적 요소를 이상화하였다. 인민의 원초적 힘을 신뢰하였던 바쿠닌은 그저 인민을 반란에 참여시키기만 하면 된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그는 마르크스나 드가체프와도 달랐다.
바쿠닌의 이러한 인식에는 일종의 러시아-슬라브적 메시아 정신이 스며있다. 그는 빛은 동방에서 온다고 보았다. 전 세계를 휩쓸 대화재가 러시아에서 인민에 의해 일어나, 서구 부르조아 세계의 암흑을 밝혀줄 것이라는 기대가 여기에 서려 있다. 1842년 바쿠닌은 이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끝없이 넓고 눈 덮인 제국, 아마도 위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나라인 러시아에서조차 뇌우를 예고하는 검은 구름들이 모여들고 있다! 오, 대기는 불안하며 폭풍을 잉태하고 있도다!
바쿠닌은 구세계의 파괴를 원하였다. 또한 구세계의 폐허와 잿더미 속에 신세계가 자연스럽게 대두하리라고 믿었다. 그는 그 누구도 최소한 신질서에 대한 막연한 생각도 없이 파괴를 목표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미래상이 생생하게 잡힐수록 파괴력은 가일층 강해지는 것이다. "파괴의 욕구는 창조의 욕구"라는 그의 경구는 이러한 정서를 집약하고 있다. 그의 관점에서, 자유로운 자치 사회의 건설을 위해서 국가는 깨끗이 사라져야 할 존재였다.
이러한 영감의 원천이 바로 농민 봉기의 전통이었다. 바쿠닌은 농민 봉기가 지닌 파괴력의 원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본성상 자연발생적이며 혼란스러우며 무자비한 인민 봉기는 항상 재산에 대한 광범위한 파괴를 전제한다. 노동 대중은 이러한 희생의 태세가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영웅적 위업을 가능케 하는, 그리고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목표의 수행을 가능케 하는, 거칠고 야만스러운 힘을 이들이 형성하는 요인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재산을 별로 또는 전혀 갖고 있지 않기에 그로 인해 부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어의 편법이나 승리를 위해 필요할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촌락이나 도시에 대한 파괴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재산이 인민에 속해 있지 않는 만큼, 그들은 매우 자주 파괴에 대한 적극적 욕망을 드러낸다.
이에 대한 Lichtheim의 설명에 의하면, 이 과정에서 바쿠닌은 하나의 추상물로서의 국가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물건과 재료, 즉 건물과 도시, 문화유산까지 실제로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은 러시아 농민층이 자신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문명에 대하여 어렴풋이 느낀 것을 바쿠닌이 언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바꾸닌은 러시아 인민이 지닌 봉기의 심성과 정서로부터 억압적 권위를 분쇄하는 동력을 찾고자 하였으며 헤겔과 피히테에서 그 철학적 표현을 찾았던 것이다.
C. 헤겔의 변증법과 피히테의 주의론
바쿠닌은 헤겔과 피히테를 나름대로 선별적으로 수용하면서 혁명적이고 실천적인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하게 되는 이론적 근거를 확립하였다. 그는 헤겔 변증법 속에서 부단히 새로운 상태를 창출하는 원동력으로서의 부정에 주목하여 이를 자신의 변혁 논리로 삼았다. 바쿠닌은 이러한 논리를 연장하여 스스로 급진적 이론가에 머물지 않고 행동하는 실천가로 나선 것이다. 여기에 요구되는 것은 불굴의 의지와 신념이었다. 바쿠닌은 헤겔을 수용하기 전에 이미 이러한 요건을 갖추고 피히테의 주의론을 통하여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바쿠닌에 있어서 헤겔 철학 수용의 새로운 이정표가 된 것은 1842년에 쥘 엘리자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글 <독일에서의 반동>(Die Reaktion in Deutchland Ein Fragment von einem Franzosen)이었다. 바쿠닌에 대한 평가에 인색한 Carr이지만 이 글에 대해서는, 그의 글 중에서 '가장 그럴 듯하고 정치한' 글, '대중적인 글 치고는, 존엄한 헤겔을 혁명의 철학자로 일변시켜 놓은 걸작' 또는 '진보 진영 내에서 유럽적 명성을 가져다 준' 글이라고 말할 정도다.
이 글은 헤겔주의에 대한 급진 좌파적 해석을 최초로 시도한 대표적 예에 속한다. 이 글에 이론적으로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은 부정의 원리와 행동 철학의 문제였다. 후자는 전자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바쿠닌이 생각하였던 헤겔의 공헌은 적대 요소의 대립, 투쟁이라는 개념과 부정의 절대적인 정당성에 대한 인정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어떻게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삶의 내재적 조건으로서 자신에 대한 부정을 자기 외부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 지니는 것을 통해서만 살아 있게 되는가 하는 점과, 만일 그것(모든 살아 있는 존재)이 단지 긍정적일 뿐이며 부정을 자기 외부에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정태적이며 죽어 있는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였던 것에 헤겔의 커다란 공로가 있지 않은가? ... 살아있는 하나의 유기체는 자기 내부에 자신의 죽음의 씨앗을 지님으로써만 살아 있게 된다.
그러나, Walicki에 따르면, 바쿠닌은 대립 요소가 화해, 조정되는 순간을 배격함으로써 부정에 대한 해석에서 헤겔과 결별하였다. 즉 그는 변증법적 발전 과정에서 각 단계별 결과로서 나타나는 지양(Aufhebung)을 부정과 보전의 공존상태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선행 단계(과거)에 대한 완전 파괴로 보았다는 점에서 헤겔과 달랐던 것이다. 따라서 모순 대립의 본질은 균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 우세에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긍정에 대한 결정 요소로서 오직 부정만이 그 자체 내에 모순의 총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부정만이 절대적인 정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귀결로서 바쿠닌은 미래의 창조가 기존 현실의 파괴에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결국 "파괴의 욕구는 창조의 욕구"라는 그의 경구는 "모든 삶의 영원한 창조적 원천"으로서 파괴를 수행하는 영원한 정신에 대한 신념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바쿠닌은 이러한 관점에서 적대 요소(세력) 간의 화해를 추구하는 몇몇 유형의 절충적 타협론자를 맹렬히 비판하였다. 그는 반동과 민주주의 사이의 생사를 건 투쟁에서 양자의 타협 가능성을 믿는 절충론자들에게 대오각성을 촉구하였다. 2x2=4를 주장하는 좌파와 2x2=6을 주장하는 반동 세력 사이에서 타협을 모색하는 절충론자들의 입장은 마치 2x2=5를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허구적인 것이다. 또한 바쿠닌은 전쟁에서 폴란드인과 러시아인 모두를 편들다가 결국 양쪽으로부터 처형 받은 폴란드계 유태인의 운명을 교훈으로 제시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바쿠닌으로 하여금 비타협적이고 혁명적인 인텔리겐챠로 일관하게 만든 헤겔 사상의 요소인 것이다.
바쿠닌이 수용한 헤겔 사상의 핵심 요소는 부정의 원리로서, 이 원리는 역설적으로 헤겔 사상을 포함한 철학 전반에 적용되었다. 그것은 행동을 위해 사변적 철학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였다. <독일에서의 반동>이 지닌 중대한 함의는 행동 철학의 탄생이다. 그것은, Carr의 규정대로, 바꾸닌에 있어서 '헤겔 시대의 절정'이자 동시에 '헤겔과의 작별'이기도 하였다. 이 글을 발표한 수년 후, 바쿠닌은 한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론가이기를 그쳤다. 나는 마침내 내 안에 자리 잡았던 형이상학과 철학을 극복하였다. 그리고... 실천의 세계로, 현실적 행위와 현실적 삶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쿠닌이 <독일에서의 반동>을 발표하며 사용한 '쥘 엘뤼자르(Jules Elysard)'라는 프랑스식 필명은 시사적이다. 왜냐하면 동시대인들의 관점에서 프랑스는 무엇보다도 행동과 혁명의 나라였기 대문이다. 이 시기에는 청년 마르크스를 포함한 사상가들의 독일적 요소[철학]와 프랑스적 요소[행동, 정치]의 결합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었다. 바쿠닌에게서 그의 동료인 아르놀트 루게가 기대하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점이었다. 그는 바쿠닌을 가르쳐 "독일 철학을 이해하고 교정하는 프랑스인"이라고 소개하였으며, 바쿠닌의 자극으로 독일인들이 "이론 영역에서의 자만심"을 떨쳐 버리게 될 것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바쿠닌 자신은 철학과 행동의 결합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의 관점에서 철학이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 대한 부정뿐이었고, 미래는 행동가에 속한 것이었다. 후일 그 자신의 지적에 따르면, 신의 세계 전체뿐만 아니라 형이상학 그 자체까지도 부정하게 되는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한 혁명적 헤겔학파의 거두 포이어바흐마저도 결국은 형이상학자에 불과하였으며 뷔흐너 같은 그의 계승자들도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사유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독일에서의 반동>을 집필하던 시기를 전후하여 바쿠닌은 라므네의 <인민의 정치>(Politique du peuple)와 로렌츠 폰 쉬타인의 <프랑스 현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Der Sozialismus und Kommunismus der heutigen Frankreichs, 1841)를 읽었다. 전자에서 독일 형이상학의 존재가 아예 무시된 것을 보고 바쿠닌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후자에는 생시몽, 푸리에, 삐에르 르루, 프루동 사상이 소개되어 있었는데(1844년 바쿠닌이 파리에서 프루동을 만났을 때는 이미 그의 사상을 열렬히 수용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은 추상적인 독일 철학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바쿠닌의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일관되게 기저를 형성하는 독일 철학의 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피히테의 주의론이다. 바쿠닌은 1840년 한 서신에 피히테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여기 새로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 있습니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향해 곧바로 지침 없이 나아가기 위하여, 생소하고 외적인 모든 환경으로부터 그리고 통념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추상해내는 그의 능력을 나는 항상 부러워하였습니다. ... 내게도 그러한 능력이 있지만, 아직은 독자적으로 그리고 외적인 모든 것에 도전적으로 활동하는 능력을 키워가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정치적 급진주의로 전화될 수 있는 주의론적 성향을 예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쿠닌은 피히테 철학의주의론으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던 것인가?
우선 피히테 철학의주의론적 성격은 자유의 문제가 의지와 실천의 문제로 직결되는 데서 강하게 드러난다. 피히테에 있어서 자유는 주어진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과제가 된다. 즉 자유란 결코 당장 현실적인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마땅히 존재해야 하며 달성해야 할 최고의 과제이다. 이 과제를 실천하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의미이며 목적이다.
이러한 자유관은 바쿠닌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리고 바쿠닌은 1836년의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절대적 자유, &